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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내신 관장할 수 있나(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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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교 내신성적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국가수준의 평가기준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이 계획의 착상은 지역별·학교별 격차에 따른 내신성적의 불공평성을 막고 전국의 고교 학력을 고르게 높이면서 대학의 자율적 선발권 행사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착상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시작되어 이상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전제와 문제해결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다 신중하고 광범위한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국가평가기준이 실시된다면 지금의 내신성적과는 어떤 관계를 지닐 것인가가 당장 문제된다. 일차적으로 학교의 평가를 불신하면서 내신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입장이 된다. 수학과 과학을 먼저 적용할 경우,학교의 내신평가 보다는 국가의 평가가 상위에 서게 되고 곧 교육의 평가를 학교가 하는게 아니라 국가가 관장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는 또다른 국가고시로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교육부 스스로 망가뜨리는 쪽으로 기능할 위험성이 있다.
내신성적의 현실적 격차를 막는 길은 교육환경과 교육시설을 고르게 해주는 관점에서 우선 접근할 일이다. 서울의 과학고와 벽지 어느 고교의 수학과 과학실력을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낮은 수준의 학교교육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설투자를 하고 교육방식을 향상하는 쪽으로 노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 교육을 떠받드는 중요한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교육의 정상화와 평준화교육이라는 원칙이다. 이 두 기둥은 많은 논쟁점을 지니면서도 지난 20년간 우리 교육의 방향을 설정해왔다. 적어도 이 대원칙에 위배되는 정책을 정부 주도로 제기해서는 안된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국가평가 기준안의 실시와 더불어 당장 현실화될 문제점은 고교의 등급화와 명문고의 재등장이라는 협상일 것이다.
평준화 정책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현상을 예상하면서도 이런 정책을 기획한다면 정책변화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합의과정이 필요하다. 어느 제도든 장단점이란 따르게 마련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제도를 도입할 때는 그 제도가 끼칠 전후 좌우의 사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엄밀성이 요구된다.
단지 내신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교육정책의 전반을 흔드는 제도는 애초부터 거론되지도 말아야 하고 거론할 바엔 보다 정교한 계획안으로 접근해야 한다. 초·중등학교의 교육을 보다 내실있게 하고 학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선 교육환경을 충실하게 하고,교육투자를 확충해야 한다. 이것이 정부가 해야 할 당면 급선무다. 국가가 학력을 평가하는 일은 그 다음이어야 순서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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