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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관이 바뀌고 있다(선진교육개혁: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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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학력보다 실력… 인맥보다 개성/기업들 “일과 학력은 별 관계없어”/소니사 입사원서 출신교란 삭제/일,전공강화 위해 교양학부 폐지/문·이과 구분 없애 유연한 사고력 북돋워
1945년 패망직후 일본은 절망이 지배했다.
미국 라이프지는 화염에 휩싸인 동경시가 사진에다 「기술없는 민족의 말로」라는 싸늘한 설명을 달았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은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고스란히 살아남은 8만여명의 이공계 대학생.
일본군 대본영은 「국민 총동원령」으로 고교생까지 학도병으로 내몰았지만 이공계 대학생들은 마지막까지 전선에 내보내지 않았다. 태어난 시대이름(1912∼1926년)을 따다이쇼진(대정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40년간의 세계 경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데 큰몫을 했다. 지난해 3월호 라이프지는 일본과의 경쟁력에 밀려 문을 담은 일리노이주 철강회사와 주민이 모두 실업자로 전락한 얘기를 다루면서 우울한 배경사진과 함께 『이제(우리에게)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일본은 인재를 인재로 아끼는 뿌리깊은 전통을 갖고 있다. 또 그 전통은 시대흐름에 따라 인재를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철저한 학벌사회였던 일본에도 지금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 학력 대신 실력이,인맥 대신 개성·창의성이 사람을 가리는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일본에도 입시철마다 대학별 예상 커트라인인 「편차치」가 주요 뉴스로 눈길을 끈다. 점수로 대학의 서열을 가르는 편차치에서 지난해 1위는 변함없이 도쿄대가 차지했다. 2위는 교토대고 다음으로 ▲와세다대 ▲히토쓰바시(일교)대 ▲게이오대 순이었다.
그러나 같은해 일본의 4백64개 대기업 인사부장이 꼽은 대학의 서열은 좀 다르다(다이아몬드지 조사). 「기업 입장에서 본 좋은 대학」으로 인문·이공계 모두 와세다대를 첫째로 지목한 것이다. 「좋은 대학」 2위는 게이오대가 뽑혔고 도쿄대는 문과에서 3위,이공계에선 5위로 밀렸다.
인사부장들은 와세다대 출신의 개성과 조직관리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한결같이 기업에 대한 공헌도는 학력과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요즘 일본기업들은 조직 적응력이 뛰어난 메이지(명치)대·호세이(법정)대의 럭비부나 일본체육대학의 출신을 앞다투어 스카우트하고 해외 비즈니스쪽에는 외국어 잘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조지(상지)대 출신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인재관이 변화하면서 신입사원 채용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소니사는 최근 입사원서에서 출신학교란을 없애버렸다. 지역감정에 시달리는 우리 기업들이 본적란을 없앤 것처럼 앞으로 학력을 가라지 않고 뽑겠다는 것이다.
○일류대 출신 탈피
일본 대학생들의 입사 희망 1위는 종합상사. 일본 최대 종합상사인 이토추는 최근 오랫동안 고수해온 지정학교제도를 폐지했다. 그동안 소수의 일류대학을 지정해놓고 그 출신만 면접을 거쳐 채용해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재를 뽑기 시작한 것이다.
교토의 모리(삼)정기연구소에는 박사학위 소지자가 없다. 이 회사의 사원 선발은 오로지 「기계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모리사의 특허와 정밀도는 세계 최고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도 학위·학력보다 실무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고 있다.
파리 10대학 박사과정(국제경제) 출신 장씨(28)는 2년전 엥도스웨즈은행이 국제금융전문가 1명을 채용할 때 다른 2백여명과 함께 원서를 냈다. 입사시험은 실제상황을 주고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느냐」를 놓고 수험생들끼리 1대 1 토너먼트로 며칠간 계속됐다.
박사출신인 장씨와 결승전에서 맞붙은 사람은 10년동안 다른은행에서 국제금융분야를 다뤄온 30대 초반의 에콜(전문학교) 출신.
장씨가 결국 떨어졌다. 『솔직히 실무능력에서 밀렸다』고 털어놓은 장씨는 지금까지 실업자로 있다. 다양한 신입사원 선발과 함께 선진국 기업들이 요즘 새로 눈을 돌리는 것은 의식이 굳어있는 기존 사원의 재교육이다. 새로운 방식의 연수를 통해 다양성·창의성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지난해 매출 35억달러로 세계 화장품업계 2위를 차지한 일본 시세이도사. 그러나 프랑스 고급 향수업체 코프시사의 장 그리보리 회장(48)은 전년대비 매출이 30%씩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시세이도에 대해 그 성장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했다.
『시세이도의 매출액 대부분은 피부보호용 기초화장품에 몰려 있다. 반면 프랑스 화장품은 향과 색조가 중심이며 오랜 전통과 창조성이 뒷받침되던 것이다. 시세이도는 영국식 기계주의(화학 화장품)은 따라 잡았지만 프랑스의 독창성은 따라올 수 없다.』
시세이도도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고 지난해부터 「뉴 시세이도」라는 개혁의 불씨를 댕기고 있다.
○“사람이 곧 공장”
개혁은 직책 대신 「○○씨」라고 자유롭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데서부터 화장품·의약품의 영역을 융합시켜 새로운 지평을 열자는 장기적인 전략설정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원들의 굳어있는 의식을 창의적이고 유연하게 바꿔 또한번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새로운 인력에 대한 일본기업들의 이런 절박함은 「사람이 공장」이란 일본 종합상사들의 새로운 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동경∼대판 중간쯤의 시즈오카(정강)현 이즈(이두) 반도.
푸른 스루가(준하)만과 후지(부사)산 자락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야산 언덕.
11만평의 넓은 부지에는 이토추상사의 연수센터인 「이토추 아카데미」 공사가 한창이다. 고급호텔 수준의 내부시설과 완벽한 외국어 연수시스팀의 이토추 아카데미는 벌서 세계 최고의 연수센터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기업의 연수는 1대 1의 OJT교육,이른바 현장 중심의 도제식 훈련이 전부였다.』
다카하라(고원의) 이토추 연수부장은 그러나 이런 「붕어빵 찍어내기식」 연수로는 앞으로 필요한 다양한 인간형은 기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토추가 불황속에서도 98년까지 연수센터에 과감히 1천6백억원을 쏟아붓고 1주일이던 신입사원 합숙연수를 1개월로 늘린 것은 창의적이고 개성있는 다양한 인재확보를 위한 것이다.
○일기업 연수강화
같은 이유로 미쓰비시의 「인재개발실」,마루베니의 「인재육성실」,미쓰이의 「능력개발실」 등 일본 종합상사들 사이에는 새로운 연수조직 강화가 이미 큰 물결을 이루고 있다.
학벌·인맥 중심인 일본 사회의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미야모토(궁본정웅) 혼다자동차 인재개발센터 소장은 『일본 사회의 뿌리는 기업이고 지금 기업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며 『일본 기업의 인재관 변화는 곧 교육에 대한 수요가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시장논리에 따라 수요가 공급을 결정하는 만큼 대학도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교육의 방향(공급)을 창의성·다양성쪽으로 바꿀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대학 캠퍼스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고베대에 이어 올해 동북·군마·명고옥대가 교양학부를 폐지했고 내년에는 오사카·지바·규슈대 등 6개 국·공립대학이 교양학부를 없애기로 했다. 교양과목 대신 컴퓨터나 외국어를 비롯한 전공과목 학습을 강화,학생들을 급변하는 시대흐름에 보다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양하고 개성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새로 설치된 게이오대의 종합정책학부,교토대의 종합인간학부,고베대의 국제문화학부 등은 이과·문과 등 기존 학문의 영역을 허물고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해 폭넓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학생들을 배출함으로써 기업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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