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을살리자>8.개-삽살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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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문헌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육역사를 지니고 있다.「삽사리」라고도 불리며 성격이 온순하고 주인을 잘 따르는 데다 아무 것이나 잘 먹는 식성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었다. 우리 말중「내쫓는다,퍼낸다」는 뜻의「삽」과「액운.재앙」의의미를 지닌「살」이 합쳐 그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알려진 삽살개는 조선시대 민화 등에「귀신 쫓는 개」로 그려지는등 서민생활속에 깊숙이 자리잡았던 개.최근에는 모 공군부대 군 견반의 테스트 결과 언어지각 능력과 후각.청각.시각.촉각 등이 셰퍼드에필적하는 것으로 나타나 군견으로도 활용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언제,어디서,어떻게 들어와 사육되기 시작했는지등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金庾信장군이 삽살개를 싸움터에 데리고 다녔다』는 얘기가아직도 경주건천 지역에서 口傳되고 있는 점등으로 미뤄 신라시대귀족들도 즐겨 길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조선 중종때발간된『訓蒙字會』(한자의 음과 뜻을 한글로 적은 책)에는「犬」자를「가히(개)」로 설명하고,속칭「삽살개」로 표기해 당시 널리사육되던 대표적인 토종개였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숙향전이나 춘향전의「烈女春香守節歌」에도『桂花밑에 삽살개가 짖는구나』라는 문구가 나오는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삽살개에 대한 대목이 발견되고 있는 점 등으로 봐서도 당시 널리 사육됐던 것으로 보인다.
또「中國九華山誌」「西藏文化」등 중국문헌에『신라 33대 聖德王의 장남인 金喬覺스님이 24세때인 서기 719년 볍씨와 삽살개를 데리고 중국 安徽省 지역으로 들어와 벼농사 법을 전했다』는내용이 기록돼 있기도 해 우리의 토종개였을 것이 라는 추정에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한다.그러나 일제가 삽살개를 전쟁에 필요한가죽 공급원으로 삼아 조선총독부령(제26호,40년3월8일)으로「한국내의 개가죽 판매제한령」을 공포,연간 10만~50만 마리씩 죽어가면서 멸종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그러나『內鮮一體를 주창하던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로 우리 것을 말살하기 위해 1938년 일본 토종개와 닮은 진도개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삽살개는 무참히 도살해 씨를 말리려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게다가 6.25 전쟁을 전후해 밀어닥친 외국종들과 피가 섞이면서 일부 남아있던 씨마저 멸종위기를 맞았다가 다행히 산간 오지 마을이나 시골에 남아있던 극소수가 「오염」을 피해 명맥을 유지,겨우 멸종 위기만은 넘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삽살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69년부터.
당시 경북대 수의과대학에 재직하면서 한국애견협회 심사위원직을맡고 있던 卓練斌교수(55)가 어느날 아프리카産 개를 심사하던중「우리 토종개는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삽살개 찾기 작업에 뛰어든 것이 그 시초였다.
卓교수는 이후 전국을 뒤진 끝에 경북과 강원도 일대에서 생김새등 옛 모습이 비교적 잘 간직돼 순종으로 보이는 30마리를 발견해내는데 성공,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결과 지금은 2백20여 마리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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