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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찾아서>이청준 새장편소설 흰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삶 앞의 장애나 고통을 피해갈수 없을 바엔 그것을 차라리 진득하게 끌어안고 삭여나가는 지혜,나는 이것을 우리 고유정서의한 핵심이라할 恨의 본질이자 미덕으로 봅니다.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갈 시대의 일들은 크고 작음,곱고 미움,선하 고 악함을 가릴것 없이 각기 그 값대로 받아들여 함께 감내해가야할 우리 몫의 엄연한 실체입니다.민족의 화합을 위해,통일을 위해 우리 민족의 좋은 심성인「함께 아파하기」에 기대 쓴 것이 이 작품입니다.』 작가 李淸俊씨(54)가 장편소설『흰옷』을 계간『文藝中央』겨울호에 전재했다.영화『서편제』의 원작자로,또 우리 고유정서에 바탕한 恨의 美學으로 1백만 관객과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李씨는『흰옷』에서도 역시 恨의「서편제적 정서」를 앞세워 이념때문에 갈린 민족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있다.
『서편제』에서 판소리가락과 恨많은 우리의 山河가 우리를 아프게 했다면『흰옷』에서는 바닷가 여선생의 풍금소리와 해맑은 동요,그리고 유년을 신비스럽게 감싸고 있는 바다안개가 시리게 들어온다. 『흰옷』의 무대는 작가의 고향이기도한 全南長興의 한 갯마을.6.25때까지 그 갯마을 국민학교를 다녔던 아버지와 40여년후 그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한 아들이 40여년을 건너뛰어 6.25당시 학교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작품의 기둥줄 거리.
해방이후 갯마을에 해변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펼치게된 젊은 선생들은 6.25가 발발하자「빨갱이」로 몰려 희생되거나 입산 투쟁을 벌이다 산화한다.학교도 불타 없어져 버린다.유실된 그 학교의 초창기 역사를 父子가 복원한다.학교역사 편찬을 맡은 아들,그리고 늘 그 학교시절을 그리워하며 자랑으로 삼던 아버지.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낸 젊은이답게 사회과학과 이념에 친숙한아들은 6.25에 희생된 그 학교 선생들을 주체적 민족주의자,숭고한 사회주의자로서 높이 바라보려한다.
그러나 동심의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그러한 이념적.
역사적 접근이 못마땅하다.동심에 무슨 사상이며 이념이 있었겠는가.헐벗은 아이들을 모아 ㄱㄴㄷㄹ과 1234를 가르치는 선생들,또 처녀선생의 풍금소리가 좋았을 뿐이다.
동요를 가르치고 적치하에서는 혁명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그여선생은 그저 풍금이 좋아 풍금을 따라 입산했다가 죽었다.그 여선생에 대한 시리도록 아픈 마음과 신비스러움만이 아버지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것이다.아들의 역사의식과 아버지 의 「恨의 정서」로 역사를 복원해나가던 『흰옷』은 아들이 그 국민학교 교사.학생들과 함께 당시 희생된 선생.토벌 군경들의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더러는 좌우로 서로 길을 달리하면서도 마음속 소망만은 저들의 내일을 위해,저들의 밝은 꿈과 소망이 꽃필 이 땅,이 땅 사람들의 밝은 삶을 위한 사랑으로 뜨거웠거늘.…꿈이 노래를 잃으면 제 마음을 묶는 사슬이 되는 법이라.이념과 사상의 사슬,대립과 미움과 원한과 복수의 사슬,거짓과 속임수와 미망의 사슬들을…누구보다 저 아이들에게서 그걸 끊어 풀어줘야제.오늘 다시저 아이들을 묶는 사슬을 만들지 말아야제.』위령제에서 초창기 해변학교 설립자이기도 했던,살아 남은 한 선생이 망자들의 말을받아 한 말이다.이 말은 민족화합과 통일을 향한 작가 李씨의 목소리이기도 하다.이 메시지를 관념이나 이야기 위주가 아니라 해맑은 동심과 恨의 정서적 결에 실어 눈이 시리도록 안타깝고 아프게 보여주고 있는 것 이 『흰옷』이다.
〈李京哲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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