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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외무부 의전장-격식이 생명인 나라의 얼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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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달 美國 시애틀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정상회담에 참석하는 金泳三대통령의 첫 해외 나들이를 준비하는 의전팀의 움직임이 바쁘다.
儀典長은 국가 의전행사의 총감독이자 한 나라의 얼굴.
대통령의 해외 나들이나 외국 국빈의 내방과 관련된 의전업무를총지휘하고 외국 대사들이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행사 준비는 물론 외교사절단 지원 업무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전장의 소속은 외무부지만「외무부 의전장」이 아니라「국가 의전장」인 셈이다.이때문에 외무부는 세련된 매너와 품위,순발력 있는 대표적 고참 외교관을 의전장으로 기용하며 역대 의전장들은 대부분 6척 장신에 마스크가 수려하고 외 국어가 능통했던 사람들이었다.
朴東鎭.李源京.李範錫 前외무장관등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들은외교업무의 사령탑까지 올랐었다.
외무부 직제상 의전장은 장관.차관.외교안보연구원장.제1차관보.제2차관보.기획관리실장.외교정책기획실장등에 이어 8번째지만 차관보와 마찬가지로 특2급에 속한다.
외무부 의전장실은 의전심의관(2급).의전담당관(4급).駐韓공관담당관(4급)등 사무관이상 공무원 12명이 2개과로 짜여진 단출한 조직이다.
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때 외무부장관 비서실 소속의 의전과로 시작,56년 의전국으로 분리 독립한데 이어 61년에는 의전장실로,63년엔 의전실로 각각 개편됐으며 70년 외무부에 영사국이 신설되기 전에는 여권업무를 맡는등 덩치가 꽤 컸었다.
그러다 81년 정부 직제개편으로 각 부처는 室을 하나밖에 갖지 못하도록 한 방침에 따라 의전실이 없어지게 됐고 의전책임자명칭도「의전실장」에서「의전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동안 의전장 자리를 맡았던 사람은 초대 朴東鎭 前외무장관을비롯,현재의 崔東鎭의전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20명.
이들중 朴東鎭.李源京씨등 원로들은 의전국장이라는이름으로,83년 아웅산사건으로 순직한 故李範錫 前외무장관은 의전실장으로, 盧永璨외교안보연구원 부원장등은 의전장이란 명칭으로 각각「나라의얼굴」역할을 대략 1년6개월~3년씩 맡았었다.
의전장은 통상 대통령의 외국 방문 30~40일전 의전.공보.
경호팀을 이끌고 현지에 가 당사국 카운터 파트들과 방문일정이 한치의 차질도 없이 이뤄질수 있도록 한뒤 대통령이 오면 함께 일정을 보낸다.
특히 의전장은 우리나라의 체면이나 위신이 맞물려있는 문제를 놓고 상대국 의전팀들과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일이 잦다. 89년 盧泰愚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기 앞서 대통령 일행보다 일찍 러시아에 도착한 朴健雨 前의전장은 모스크바대학에서 盧대통령이 명예박사학위를 받도록 주선하는 일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이 盧대통령을 어디에서 맞을 것인가 하는 의전문제를 놓고 가슴앓이를 해야했다.
靑瓦臺로부터 박사학위를 반드시 받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모스크바대측은『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명예박사학위를 남발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민주화를 맞고 있는 요즘은아무에게나 박사학위를 줄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
그래서 朴의전장은 당시 駐러시아 孔魯明대사(현 駐日대사)와 함께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盧대통령에게 박사학위를 안겨줄수 있었다.
또 러시아측은 관례를 내세워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크렘린궁 접견실홀의 맨끝에 서있다가 盧대통령이 한참 걸어서 들어오면 악수를 나누도록 해야한다고 고집,줄다리기를 거듭한 끝에 양국 정상이 서로 접견실을 반쯤씩 걸어가 중간지점에서 만나 도록 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82년9월 全斗煥대통령은 韓國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국가를 순방했는데 가봉에 들렀을때 공항에서 군악대가 애국가가 아닌 北韓 국가를 연주하고 말았다.
이때 의전장이었던 盧永璨 외교안보연구원 부원장은 얼굴이 사색이 돼 연주를 중단시켰는데 당시 봉고 대통령 비서실장등 관계자들이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고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봉고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봉고 대통령은 만찬사에서 국가연주 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全대통령이 답사를 하는 도중에 비서실장을손짓으로 불러『왜 사과하지 않느냐』고 항의,결국 全대통령의 답사가 끝난뒤 봉고 대통령이 다시 일어나 사과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의전행사는 아흔아홉가지 일을 잘치르더라도 한가지일을 그르치면 결국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의전장은 모든 행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속에서 살아야 한다.
특히 전통과 문화가 아주 다른 외국인들을 상대로 의전행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사전 연습을 완벽히 한다해도 실수가 발생하는 일이 잦아 의전팀들 사이에는『의전은 자기도 믿지말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통용된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이같은 실수 하나로 대통령의 미움을 사 의전장 자리를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82년 A국 대사의 신임장 제정과 관련해 물러난 金炯根 의전장은 그 대표적인 예.
외무부 의전팀은 A대사가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靑瓦臺로 들어가기전『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야하며,두손으로 신임장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게 韓國의 예절』이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이같은 우리 정부측 주문에『예스』를 연발하던 A대사는막상 靑瓦臺에서 신임장을 제정할때 긴장한 탓인지 全斗煥대통령에게 왼손으로 불쑥 신임장을 내밀었고 이 순간 全대통령의 표정이일그러졌다.
이때 全대통령은 화가 나『이놈 봐라』고 말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도 외교가에 나돌았는데,하여튼 全대통령은 金의전장을 다음 행사때부터 참석하지 못하도록 해 의전차장이 대신했고 金의전장은 그뒤 외국 대사직으로 밀려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50년대 朴東鎭 의전장은 부하직원이 리셉션장에 초청할 인사와만찬장에 초청할 인사를 혼동하는 바람에 억울하게(?)물러난 케이스. 고딘 디엠 越南대통령이 訪韓,李起鵬 국회의장 주최로 만찬을 베푸는데 리셉션장에 초청받은 인사가 대거 만찬장에 참석하는 바람에 李의장의 노여움을 사 朴의전장은 물러나고 말았다는 것. 그러나 의전행사가 차질을 빚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것이 결국 전화위복이 돼 대통령의 목숨까지 구한 의전장도 있다.
10년전 아웅산사건 당시 의전장이었던 盧永璨씨가 그 주인공.
당시 全대통령은 미얀마 외무장관의 안내로 숙소에서 아웅산 묘소로 향하기로 돼있었는데 그가 예정보다 5분이나 늦게 나타나 全대통령은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었으며,화풀이로 그 랬는지는 몰라도 호텔방에서 3분가량 있다가 차를 타기위해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고 한다.
결국 全대통령 일행은 예정보다 8분여 늦게 출발한 셈이었고 이때문에 全대통령은 물론 차량행렬중 선도차에 탔던 盧의전장도 화를 면하게 됐다.
74년 제럴드 포드 美國대통령의 訪韓 당시 의전장이던 池蓮泰씨는 포드대통령이 離韓인사차 靑瓦臺를 방문했을때『오나시스가 美國에 와서 데려갈 사람은 재클린 밖에 없다고 했듯이 韓國에서 한사람만 데려가라면 池蓮泰의전장을 데려가겠다』고 말해 故朴正熙대통령은 어린이처럼 기분좋아했다는 후문이다.
의전행사는 대통령의 성격에 따라 사뭇 달라 朴正熙.盧泰愚대통령은 격식을 갖추면서도 의전팀의 실수에 비교적 관대했던데 반해全斗煥대통령은 의전행사가 차질을 빚으면 엄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75년 가봉 봉고대통령이 訪韓했을때 중앙청에서 만찬을 베푼 朴대통령은 5분이 지나도 봉고대통령이 안나타나 초조하게 기다리던중 수행원 차량이 나타난 것을 보고 군악대가 봉고 대통령이 온 것으로 착각,팡파르를 잘못 울리는 바람에 의전 팀은 사색이 돼 팡파르를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이때 朴대통령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金泳三대통령은 형식적인 의례를 매우 싫어하는데다 옆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비교적 너그럽게 대하는 편이라 의전팀들이 한결 수월하다고 한다.
〈朴義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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