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문인들 사진.친필원고등 수집 문단사진사 김일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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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 20여년간「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문단 大小事에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 온 金一州씨(51.인천시중구항동7가 라이프아파트).
문인이 얼굴을 보이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나타나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는 그는 상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인사진만 6만여장을 찍어 지난 60년중반이후의 문단史를 한손에 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또 트럭 한대분에 달하는 1천여 문인의 육필원고,그리고1백여 문인의 육성 녹음테이프도 갖고 있는데『앞으로 한국문학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
그가「문단의 감초사진사」가 된 것은 청록파의 한사람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趙芝薰시인이 68년 사망했으나 일부 지방신문에서는 사진 한장 실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
당시 인천 경기일보 편집부 기자였던 그는 趙시인의 얼굴사진을지면에 쓸수 없었던 안타까움에 그 스스로 한국의 문인사진을 모조리 찍어 모아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했다.
66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山靈祭」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평소 趙시인을 흠모해 왔던 것이 큰 이유로 작용한 것같다고 전했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70년 문인들을 보다 자주 접할 수 있는 독서신문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아예 사진담당자로 발벗고 나섰다.
사진학원에서 몇개월간 이론과 실기를 터득한 것이 사진에 대한배움의 전부라고 겸연쩍어 하는 그는 그러나『예술적 측면에서는 사진작가들에게 미안한 감이 있지만 기록성에 있어서는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문학사상.세대사.한국문학등 문학지들을 두루 거치면서그는 자연스레 문단소식을 쉽게 접하게 됐고 문단시상식.출판기념회.술자리등 문인이 많이 나타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는 이런 문학잡지사들을 거치면서「문인들의 기벽」「작가의 밀실」등 기획기사의 취재및 사진을 도맡아 웬만한 도서관이나 언론사 자료실이 소지하지 못한 재미있고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사진들을 만들어 냈다.
소설가 李範宣씨가 뇌졸중으로 작고하기 하루전의 얼굴,시인 徐廷柱씨가 가야금 연주를 하는가 하면 굵은 염주를 손에 든채 잠들어 있는 모습,문학평론가 故 趙演鉉씨가 호숫가에서 신발을 벗은채 담배를 피우면서 상념에 잠겨있는 모습,역시 고인인 소설가安壽吉씨가 피리를 부는 모습,소설가 朴景利씨가 사위며 시인인 金芝河씨가 투옥돼 있을 당시 칭얼거리는 외손자를 등에 업고 달래는 모습,소설가 黃晳暎씨가 야유회에서 허리띠를 풀러 뱀장사 흉내를 내는 사진등은 그가 아끼는「 작품들」.흑백 5만장,컬러슬라이드 1만장에 달하는 사진자료는 필름상태로 분류돼 그의 인천집 응접실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현재 문단에 등록돼 있는 문인은 약 4천명.그는 60년대 후반이후 문인들은 거의 망라해 사진에 담았다고 자랑했다.
미친듯이 찍기만 하고 형편이 넉넉지 않아 당사자에게는 사진한장 빼주지 못했다는 그는 가까웠던 일부 문인들과의 관계가 사진때문에 소원해 질때는 속이 많이 상한다고 전했다.
그는 또 문학잡지에 몸을 담았던 만큼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원고를 출판후 모두 긁어모아 중형트럭 한대분 이상에 달하는 1천여 문인의 원고뭉치들을 자택 마루방에 쌓아놓고 있다.이제 그가육필원고를 모은다는 사실이 알려져 일부 출판사 주인들은 그에게의뢰해 원고뭉치로 비좁아진 사무실을 청소할 정도.
그중에는 소설가 安壽吉씨의 2천장 짜리 장편소설『을지문덕』,시인 金珖燮씨의『성북동 비둘기』,李炳注씨의『지리산』,趙善作씨의『영자의 전성시대』원고들이 포함돼 있다.
1백여 작고및 원로문인들의 육성은 그가 취재할 때마다 보관을위해 녹음해 온 것들.
그는 지난 82년 1백80여점의 대표작을 소개하는「한국문인사진전」을 열기도 했으며 83년에는『시인의 얼굴』이라는 사진집을출간하기도 했다.
이제 그의 이력은 널리 알려져 한국문단에 관련된 책을 내는 출판사들은 으레 그에게 자료 도움을 받고 있다.『사진으로 보는소설 70년사』『한국문학대계』등은 그의 협조로 이루어진 책들.
그러나 아직 사진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낮아서인지 그는 오로지 문단史 정리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거의 무료로 자신의 자료를 빌려줘 왔다고 했다.지난 90년 잡지『인물계』의 편집장을그만두고 한국문학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자료수집에 골몰하고 있는 그는 현재 생업을 위해 새벽나절 아내.노모와 함께연안부두에서 생선 포장용구등을 판매하고 있다.
저녁에는 또 이곳저곳 문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가 예의 카메라를 들이대는 작업을 하고 있다.그러나 얼마전부터 달라진 것이 있다.늘 혼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땀을 흘리며 종횡무진 행사장을 누볐던 그에게 이제 조수가 생긴 것 .
무보수로 봉사하는 조수는 다름아닌 그의 장남 종민군(25).
늘 사진에 미쳐지내는 아버지가 보기 좋았던 탓일까.아들은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연세대 교재용 사진사로 일하면서문인들이 많이 나타나는 행사에 아버지를 따라나서 고 있다.
『그동안 모은 자료들을 모두 한번 전시해 보고 싶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할지 모르겠다』는 그는『마루방에 보관된 원고가 삭고 쥐가 쏠기도 해 이를 잘 보존할 수 있는 시설에 하루 빨리 보관돼야 할텐데…』라며 긴숨을 내쉬었다.
〈高惠蓮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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