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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열린 민족공조'로 가자

중앙일보

입력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민족공조를 강조해 왔다. 올해의 출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 기치 밑에 민족공조로 자주통일의 활로를 열어 나가자"라는 신년 공동사설에 잘 나타나 있다. 핵문제.경제난 등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북한이 위기 타개를 위해 그나마 믿을 만한 남쪽을 상대로 '민족공조'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북한은 이런 주장을 통해 미국의 강경정책에 맞서 남북 화해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북한이 공동으로 대처해 나갈 명분을 찾으려는 저의도 보인다.

*** 北, 입으론 공조 외치며 긴장 조성

북한의 명분과 수단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민족공조를 내세우면서 '민족공조는 애국이고, 외세공조(한.미공조)는 매국'이라는 북한의 선동적인 구호전술과 이분법적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서로 굳건한 공조를 이루어 나가자는 데 이해를 같이했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공조에 대해 우리 국민과 해외동포들은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남북공조에 대한 두 정상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북측이 취한 행동은 공조의 실천을 미심쩍게 하였다.

먼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측면에서 보면, 2002년 6월에 발생한 서해사건과 그해 10월에 다시 불거진 북핵문제는 공조 정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서해상의 무력충돌과 북핵문제는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다음,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 측면에서 보면 남북 양측은 인적.물적 교류협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 성과도 적지 않다. 남북한 철도.도로 연결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육로관광 사업 등이 활발히 추진돼 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각급 회담이 상시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북핵문제가 큰 걸림돌이다.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개성공단 건설을 비롯한 진행 중인 협력사업뿐 아니라 새로운 추진사업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한은 민족공조를 외치면서 스스로 자초한 핵 장애물의 제거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국제사회 환경에 적절한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현재의 위기상황은 북한과의 대결관계에 있는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북한 또한 강경정책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아직 북.미 상호 간의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북한은 더 유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껏 북한이 주장한 민족공조는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일방적 민족공조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닦는 데 도움이 안 됨을 북측도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미국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비난하면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미 자주화를 위한 민족공조는 오늘날 북측이 처해 있는 난제를 타개할 수 없다.

*** 反美 대결구도로 가선 안될 것

국가 간의 상호 의존이 심화되고 있는 국제질서하에서 국제적인 공조와 협력은 불가피하다. 특히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를 위해서는 주변 관련국들 간 신뢰와 호혜 관계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분단된 '닫힌 자주'가 아닌 '열린 자주'를, '폐쇄된 민족공조'가 아니라 국제사회와 함께하는 '개방된 민족공조'를 위한 북측의 인식변화가 요구된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남북이 진정으로 화합하는 상생적인 민족공조를 기대해 본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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