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교육부 장관-벼랑에 선 백년대계 땜질행정 눈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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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교육부장관은 일견 하는 일이 별로 없어보인다.
일 자체가 靜的인데다 대부분 사안들이 영속성을 띠고 있는 교육행정의 특성 때문이다.
다른 부처가 가령 율곡사업이니,고속전철이니,대단위 건설사업이니,올림픽이니,수출이 어쩌니 하며 부산할 때도 더불어 생색낼 거리가 없다.
그저 과거부터 해오던 시책들을 잔손질 해가며 지속할뿐,예컨대대학수학능력시험의 도입과 같은 큰 시도는 정말 어쩌다 국가적 큰 시책으로 추진할 따름이다.
그래서 교육부장관이란 직책도 아무 일 안하고 시간만 때우든,온갖 연구와 구상을 해가며 노심초사하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자리라고들 한다.
정부 출범과 함께「교육개혁」을 기치로 내건지 8개월째.
연초부터 잇따라 터져나온 대입부정과 학력고사 정답유출사건등으로 어느 때보다 숨가쁜 나날을 보낸 吳炳文장관과 그 수뇌부들은과연 어떤「개혁」의 모습을 펼쳐 보일는지 온 국민의 시선이 뜨겁다.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후부터 교육개혁은 국가의 당면 大事였다. 1948년 정부수립후 지금까지 33명의 장관이「國家百年之大計」를 설계하는 중책을 맡았으나 결국 오늘 우리의 교육이 「벼랑끝에 서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 크다. 장기적 안목을 펼치기보단 현안에 대한 땜질처방에 급급했다는반증이기도 하다.
교육부장관이 하는 일은 정부조직법 35조에「학교교육.평생교육및 학술에 관한 사무를 掌理한다」고 명시돼 있다.
유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그리고 재외국민들의 소위 「배우는 일」을 관장하고 책임지는 그야말로 엄숙하고 신성한 자리다. 역대 교육부장관(30대 鄭元植씨까지는 문교부장관)은 대부분 학자출신의 교육계 원로였다.
예외적으로 61년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보임된 해병대대령출신의 文凞奭씨(10대)와 역시「혁명세력」인 19대 洪鍾哲씨등2명의 軍출신도 끼어있긴 하다.
어쨌든 정통교육행정관료출신의 장관이 한 사람도 없는 외부로부터의 고공낙하인사들이다 보니 자칫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사례도종종 있어왔다.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安浩相장관이 부임하기전 우리의 문교제도는 美軍政하에서의 태동기를 맞는다.
日帝를 벗어나 교육재건을 해나가기 위한 자문기구로 韓國敎育委員會와 朝鮮敎育審議會가 발족돼▲교육이념▲의무교육제▲학제▲교과등주요 부분을 母胎했고 진통끝에 국립서울대학교를 신설했다.
초대 安장관에서부터 8대 吳天錫장관 무렵까지는 이같은 흐름속에서 오늘까지 이어지는 교육제도의 기본골격을 잡게된다.
「自主와 民主」「弘益人間」을 교육이념으로 49년 敎育法이 제정됐고 50년6월1일을 기해 초등6년의 의무교육제도가 시행(6.25전쟁으로 실시는 늦어짐)됐다.
대 安장관은 3백40만명에 이르는 문맹 퇴치 5개년계획을 세워 문맹률을 낮추는 작업을 본격 시작했으며 2대 白樂濬씨는 51년 현재의 6-3-3-4학제를 도입했다.
4.19와 함께 과도정부에 의해 7대 장관에 임명된 李丙燾박사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敎員노조로 몸살을 앓았으며 현재의 全敎組사태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당시의 敎員노조는 결국 5.16직후 軍출신 文凞奭장관에 의해 해체된다.
63년3월 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군정 4년연장」발표를 계기로 대학가는 재야와 함께 연일 시위의 회오리를 타게된다.
따라서 13대 李鍾雨장관부터는 이후 65년의 韓日협정에 따른對日저자세에 대한 성토까지 겹쳐 소위 「데모」가 장기현안으로 대두됐다.
최소한 18대 權五柄장관때까지 서울大를 포함한 대학들과 중.
고교의 일제 휴교.휴업령이 수차례 내려졌다.
15대 尹天柱장관의 경우 朴대통령으로부터『延世大를 문닫으라(휴업)』는 지시를 받고『교육이 중단되면 안된다』고 거부했다 사직당하기도 했다.
이어 부임한 16대 權五柄장관은 곧바로 교육법시행령에 학교의휴업.휴교명령조항을 삽입시킨다.
18대때 또다시 장관이 된 權五柄씨는「불칼」이란 별명처럼 성격이 강해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글을 올린 忠南大 柳正基교수를 파면시켰는가 하면 모국장은 혼쭐이 난뒤 물러나며 장관실문을 연다는게 캐비닛문을 열고,자기방에 들어가며 노크하는 등 얼이 빠져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검사.법무장관 출신의 그는 朴대통령과 배짱이 맞은 몇안되는 장관중 하나로 68년 중학입시제를 폐지했다.
또 그해 12월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기도 했다.
19대 洪鍾哲장관은 軍출신답지않은 온화한 성격으로 서울大관악캠퍼스의 마스터플랜을 구상했다.
미감아(나환자부모에서 태어나 아직 감염안된 어린이)를 일반학교에서 함께 교육하도록 했다가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세자 자신의아들을 그 학교에 솔선해 보내기도 했다.
「짱구」라는 별명의 20대 閔寬植씨는 JP와 각별한 사이여서「힘있는 장관」으로 꼽혔다.고교평준화(73년)를 도입했고 대한체육회장출신답게 국내에 처음 테니스를 보급했으며 체력장제도도 처음 실시했다.
그러나 관례와 절차를 깨는 퍄쇼기질이 워낙 강해 불만세력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10.26」「12.12」이후 과도기에 들어선 金玉吉장관(24대)은 자유분방한 성품으로 자율과 민주화를 외치다 국보위발족과 함께 5개월만에 미완성으로 끝난 홍일점.이어 말솜씨.글재주가 뛰어난 철학박사 李奎浩씨가 부임,3년5개월이란 최장수를 기록하며「5共철학」의 골격을 잡는,이른바 터잡이役을 한다.
***全 斗煥당시대통령의 실세 교육.정치참모로▲대학졸업정원제▲교복.두발자유화▲과외금지등「7.30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고 전문학교를 전문大로 개칭했다.
이어 관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는 權彛赫씨와 朴鍾哲.李韓烈군사망으로 대학가 시위몸살을 극명하게 겪은 孫製錫씨,최근 暻園大총장을 지낸 연유로 입시부정구설수에 오를뻔한 徐明源씨,아들의 高麗大부정편입학시비를 겪다 뒤늦게 해명된 金永植 씨등이 바통을이었다.30대 鄭元植장관은 全敎組교사의 대량해직을 주도했으나「겸손하면서 할일을 다하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으며,실업계와 인문계고교의 비율을 50대50으로 바꾸는 일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구상했다.교육부로 개칭된뒤 첫 장관인 尹亨燮씨(31대)는 교총회장출신답게 교육전문직우대를 강조,일반행정직으로부터의 인기는 없었으나『밤새도록 책을 읽고 공부하며 일을 하려했던 노력형』이란 긍정적 평가도 받고있다.
32대 趙完圭씨는 과학기술교육을 역설한 인물로,大田엑스포에 맞춰 93년을 과학교육의 해로 지정한 盧泰愚정권의 마지막 장관이었다. 〈金錫顯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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