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북한>34.측근세력-행정.경제기관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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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北韓에서 「대외경제개방 가속화」가 언제 정치일정에 오를지와 관련,부총리 두사람에 눈길이 간다.
현 부총리 가운데 姜成山총리에 이어 행정과 경제의 사령탑이 될 재목을 꼽는다면 단연 金達玄과 金渙이다.
대외경제위원장을 겸하던 金達玄은 작년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4차회의에서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계획」의 총수가 됐다.이에 앞서 당중앙위 6기20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돼 총리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정치경력이나 나이로 보아 파격적으로 급부상해온 그는 金日成의조카뻘로 金正日의 신진측근이다.알바니아 국제관계대학을 나온 그는 비상한 두뇌.탁월한 업무능력에다 성격도 개방적이고 원만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외국의 신문 잡지등을 손에서 놓지 않아 국제정보에도 밝다고 한다.
77년 36세의 나이로 과학원 부원장을 맡아 주목받았던 그는그해 과학원대표단장으로 폴란드를,79년 과학자대표단장으로 蘇聯을 방문하는등 해외방문도 잦은 편이다.
84년 8월 姜成山총리의 訪中때 「정무원 참사실장」자격으로 姜총리를 수행하는등 姜총리밑에서 경제행정을 배우며 정책브레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姜총리 해임뒤에도 순조롭게 계속 승진,87년 3월 화학.경공업위원장,88년 2월 국가계획위원장까지 올라 테크너크랫 간부로서의 전형적인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의 정치이력에서 중요한 해는 88년이다.6월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대외경제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대외경제」총책을 맡았기 때문이다.대외경제위원장직을 유지한채 그해 8월 조선국제합영총회사 이사장,10월에는 무역부장을 겸하게 된다.
대외경제부문에서의 그의 지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후 그는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유럽.중국등지를 빈번히 방문해 「대외경제개방」책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아울러 그해 당쪽에서도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당중앙위원으로 補選되는 행운을 잡았고 90년 5월 부총리로 승진해 이례적으로 부총리.대외경제위원장.무역부장을 겸하면서 정무원에서의입지를 강화했다.
일련의 승진과정은 대외경제에 대한 金正日의 지도력 강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延亨默총리 訪中에 동행한 그는 深수경제특구를 방문,대외개방의 최전선에 서있음을 안팎에 내보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남북경협문제도 주도해왔다.
91년 11월 文鮮明 통일교 교주일행의 초청,92년 1월 金宇中대우그룹회장의 공식초청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바로그다. 그런 그가 작년말 인사에서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를 자신의측근인 李成大(前무역부 부부장)에게 넘기고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분석을 요한다.
올해가 3차7개년계획의 마지막 연도이므로 앞으로 1~2년간 「조정기간」을 두든지,올해로 계획기간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다음계획을 수립하든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蘇聯.東歐와의 경협이 예전같지않은 상황에서 새 경제계획은 「대외개방」정책을 반영하지 않을수 없고 그렇다면 새 계획의 사령탑으로는 金達玄이 적임자일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가 姜成山후임으로 총리 1순번일 것을 예상케 한다. 한편 화학및 경공업분야의 테크너크랫이자 「개방파」로 알려진 金渙도 머지않아 총리를 맡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정치적 배경으로나 그간 金正日과의 관계로 보아 金達玄 못지않으나 한때 정치국 위원까지 지냈음에도 자리부침이 심해 승승장구중인 金達玄보다는 처진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정치국에 재진입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金渙은 日警의 포 위망속에서 金日成과 동료들을 구하고 희생된빨찌산 金赫의 아들이다.
평북 후창군 출신인 그는 만경대혁명학원.金日成종합대학 화학공학부를 거쳐 舊동독의 라이프치히 카를 마르크스공대에 유학했다.
57년 귀국해 과학원 화학연구소 상급연구원으로 일하다 62년당중공업과장에 전격 임명되면서 간부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학연구소 시절 월북화학자 李升基박사의 인조섬유「비날론」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 金渙은 무기화학분야의 전문가다.
학구적이고 말수가 적으며,고지식한 편이지만 金日成.金正日에 대한 「충실성」은 남못지않은 金渙은 68년 10월께 방직.제지공업성 부상으로 등장한뒤 72년 12월 화학공업상에 취임,전공을 살려 이 분야의 1인자가 됐다.
그러다가 74년 10월무렵 당중앙 학교교육부장직에 앉으면서 金正日과의 관계가 깊어진다.
그는 학교.교육기관에 金正日 사상연구실을 만드는데 앞장서는등의 공로로 78년 9월께 金正日부상에 미온적이던 楊亨燮대신 당교육과학비서로 발탁됐 다.
그가 당시 파격적으로 비서.당정치국 위원으로 올라선 것은 金正日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고 한다.
그는 80년 10월 6차당대회에서 정치국원.비서로 선출,82년 4월 중앙인민위원,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장에도 선출돼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중 83년 6월 갑자기 당비서에서 해임돼 「부총리」로 전출하면서 그의 경력에 삐걱거 리는 이상신호가 들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85년 10월 부총리해임 ▲86년 2월 당비서선출 ▲12월 비서해임및 화학.경공업위원장 임명 ▲87년 3월화학.경공업담당 부총리 임명 및 정치국원 해임 ▲88년 2월 부총리겸 화학.경공업위원장 임명 ▲6월이후 부총 리겸 화학공업부장(91년 12월 일시적으로 화학공업부장 사직,92년 12월부터 재겸직)임명등의 부침을 겪은 것이다.
「해임.임명」을 되풀이해온 사실과 관련해 양강도 김정숙군에 중국식특구를 만들려다 좌초해 정치국 위원.비서직에서 물러났다는관측이 유력하다.
처음 아이디어단계에서 金正日의 지지를 받아 그가 현지조사단을파견,계획을 추진했으나 최종보고를 검토한 金日成의 반대로 백지화됐다는 얘기다.그러나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 豆滿江지구개발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볼때 앞으로 金渙의 역할이 재 평가될 소지가크고 그런 날에는 그가 총리까지 올라설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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