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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묘지도 한곳에/유럽의 복합단지(선진국 무엇이 다른가: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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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구상은 첨단… 건설은 천천히
1더하기 1은 얼마인가.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하면 마지막에 누가 이기는가.
이 간단한 대의 질문에 대한 해답에는 「나라의 기초를 놓는 방식」에 있어서의 우리와 다른 나라의 차이가 있다.
「1더하기 1은 2보다 크다」는 복합화의 실익을 가능한한 키우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서두르며 눈앞의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늦더라도 여럿을 찬찬히 함께 쌓아올려야 한다. 이같은 생각이 웬만한 나라에선 상식중의 상식이다.
라 데팡(La De’fence). 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센강을 건너면 바로 들어서게 되는 신개발지역이다.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두배반인 7백60㏊(2백28만평).
지역경계를 따라 빙 둘러쳐져 있는 순환도로를 타고 돌다가 표지판을 찾아 자동차를 몰아 들어가면 코앞에 지하주차장 입구가 나오고 차를 세운 후지상으로 올라가면 거기가 바로 목적지다.
라 데팡스의 어디를 가고자 하더라도 이같은 「접근법」은 어김 없이 따라야 하는 교통규칙 아닌 규칙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라 데팡스의 중앙광장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개선문과 정확히 일직선으로 마주 보고 서있는 구자 모양의 거대한 조형빌딩(Grande Arche). 여기저기 올라가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복합빌딩군. 곳곳에서 마주치는 유명예술가들의 조형물. 단 3개의 축이 돔을 받치게끔 58년에 지어올린 국제회의장(CNIT). 수많은 관광객과 다양한 호텔·식당·상가. 「세계로 열리는 창」이란 주제를 새기로 그 자리에서부터 지구를 한바퀴 도는 원이 만나는 세계의 도시들을 그려 넣은 상징물.
아니다.
라 데팡스의 중앙 광장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그 많은 유형·무형의 것들을 처음부터 다 함께 쌓아 올리려한 「생각」과,지난 58년부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기능과 저 기능이 서로 보완해 상승효과를 낼 수 있게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거북이같은 「행동」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후발국가들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이 하나 있다.
선진국의 건물이 부러우면 더 크게,더 근사하게,더 높게 지어 올릴 수 있다. 선진국의 기계가 아쉬우면 돈을 주고 사와 물건을 만들수 있다.
그러나 선진국이 건물을 지어올리고 기계를 만들기까지의 「생각」만큼은 아무리 아쉬워도 더 크게 흉내내거나 돈으로 사올 수 없다.
그러한 점은 비단 건물이나 기계만이 아니라 법으로 뒷받침되고 사회의 약속으로 지켜지는 모든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다.<김수길기자>
◎기능 모일수록 상승효과/꿈과 긍지까지 갖춰진 자립도시/불 라데팡스
엣소(ESSO)·엘프(ELF)·히타치(일립)·모빌(Mobil) 등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라데팡스에 지어놓고 있는 복합 빌딩들도 최근의 심각한 불경기속에 여기저기가 비어있을 것이다. 라데팡스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중에는 프랑스 평균으로 따져 10명중 한명 꼴로 실업자가 섞여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데팡스에는 삶·경쟁·첨단산업·문화·예술·꿈·교육·지구화·여가·관광·긍지 등이 한데 모여 얽힌 채로 충분히 자립적인 권역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다. 변화를 원하지만 않고,직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이 지역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복합적인 기능이 라데팔스로 하여금 9백여개의 기업을 유지해 10만명의 일자리를 확보하면서 업무지역에 2만명,공원지역에 1만5천명의 주민을 쾌적하게 살게하는 기초다. 세계 50대 그룹중 13개 그룹이 이 곳에 사무실을 열고 있고 이곳 9백여개 기업의 전체 외형은 프랑스 정부의 한해 예산과 얼추 맞먹는 규모다. 그러면서도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아 그들이 떨구고 가는 부가가치 또한 적지 않다.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이 되던해에는 이곳에서 G7 정상회담을 열었는가 하면 파리오페라 발레학교도 이곳에 있다.
이같은 「복합적 기초」를 쌓아 올리는데는 30년이 훨씬 넘게 걸렸다. 대신 지금의 기초와 틀을 앞으로도 수십년 이상 거뜬히 이 지역을 받칠 것이다. 고성이나 제도의 형태로 유럽 각국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각종의 「축적」도 다 그같은 복합적인 기초를 오랜 세월 쌓아올린 결과다. 한마디로 『한번 틀을 만들면 백년은 받친다』는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축적인 것이다.
『감옥도 묘지도 다 함께 지었다. 묘지가 다 차면 지금의 뉴타운을 헐고 새로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 주민의 평균 나이는 32세로 매우 젊어졌다. 이 곳은 파리시의 베드타운이 아니다. 여기서 일하고 여기서 살도록 모든 복합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파리시 주변의 5개 뉴타운 가운데 하나인 에브뤼(Evry)시 사무국장 기타르씨의 마이다.
감옥과 묘지까지를 생각하는 복합화­.
지방자치가 근간이 되어있는 유럽의 각 지역이 이같은 복합적인 개발개념을 상식으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 몸에 밴 당연한 지혜일 것이다.
영국 웨일스의 엡 베일지역에서도 그같이 거북이 같이 복합적 개발개념의 표본을 따올 수 있다.
지난 70년대에 철강·석탄산업이 몰락하면서 함께 쇠락해버린 이 지역은 지난해 찰스 황태자 부부를 비롯한 2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을 초청,5월부터 넉달동안 대대적인 가든페스티벌을 열었다.
지난 5년 이상 공들여 닦아놓은,완전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누구나 와서 보며 즐기고 『이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기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오시오』하는 행사였다.
그동안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었느냐는 질문에 기업유치 책임자인 하인즈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경·교육·예술·식당·동물·산업·레저·호수를 특히 염두에 두었다』고.
페스티벌을 열고 난 후 어떤 변화가 왔을까.
『아직까지는 빈 곳이 많지만 계획은 다 서있고…. 이제부터 건설해야 하는데 한 5∼10년은 걸릴 것이다.』
하인즈씨의 진지한 설명이었다.
◎복합화 우리의 현실/집에 집착 신도시들도 아파트숲으로/자본 뒷받침된 포철 광양단지가 모범
우리의 경우 수많은 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처음부터 복합화를 철저하게 염두에 둔 사례는 거의 찾아 볼수 없다. 최근 토지초과이득세를 피하기 위해 서울 강남지역 빈터 등에 종합적인 기능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가건물이나 다름없는 빌딩들이 여기저기 올라간 것은 복합화라는 개념을 생각하기에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말해 주는 대표적인 보기다.
도시개발에 있어서도 분당·일산 등 신도시는 물론 경제부처가 있는 과천 등 서울외곽의 도시들이 복합적인 기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방자치가 안돼있다는 것이 가장 큰 제약이긴 하지만 신도시를 짓는 참에 복합적인 기능을 한 도시안에 가능한한 많이 갖춰 수도권집중을 해소하면서 시의 재정 자립까지를 염두에 두어보려고 한 노력은 처음부터 없었다.
당시의 가장 큰 정책목표였던 「집값 안정」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부실공사·건축자재 파동속에 전체 임금구조까지 바꿔놓아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이 신도시 건설에 대한 여러평가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평가의 하나다.
결과적으로 이들 신도시들은 철저한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기능하고 있어 폭주하는 출퇴근 교통량의 해소라는 골치 아픈 과제를 새로 안겨 주었다.
반면 복합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는 포철의 광양제철소 단지를 들수 있다. 산업만이 아니라 교육·병원·유통·주거·환경·지역교류 등을 위한 기반투자가 거의 망라되어있다.
포철과 같은 거대 자본이 있으므로해서 그같은 복합적인 개발이 가능했던 것이고 보면,복합화의 가장 첫번째 출발은 역시 자본이고 따라서 어느 지역이든 자본유치와 일자리의 창출이 가장 중요한 기초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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