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찾기>돈보따리를 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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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독사 대가리가 잔뜩 독을 품고 꼬나보는 형국이었다.몇백억 몇천억 짜리 큰손만 물어뜯을 줄 알았는데 잔챙이에까지 겁을 주고있으니 금융실명제가 꼭 살무사처럼만 보였다.순인출액이 삼천만원만 넘어도 국세청 통보,실명전환액이 오천만원만 넘 어도 국세청통보,주식매각금이 삼천만원만 넘어도 국세청 통보,들리는 소리마다 국세청 통보고 세무조사다.게다가 안방금고를 설치한다느니 금덩어리나 골동품을 사잰다느니 소문도 분분하다.모든 소문이 마치앞으로는 돈을 많이 벌지 말라는 소 리 같다.황대구씨는 요즘 장사보다 텔리비전과 신문을 통해 실명제 뉴스를 듣는 일에 더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그는 어깨춤이 절로 났었다.실명제는 틀림없이 박회장의 뒤꿈치를 물어뜯을 것이었다.독사한테 물리고 어느 큰손인들 배겨나겠는가.
『이제야 그 영감탱이 팔팔 뛰는 꼴을 보겠구먼.』 황대구씨는기분이 고소해지자 못마시는 술까지 마시고 거나하게 취했었다.돈뭉치란 원래 활개를 치고 굴러다녀야 번식력이 강해지고 싱싱해지는 법인데,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썩어갈 박회장의 돈뭉치를 생각하니 절로 신바람이 났던 것이다.황대 구씨에게는 경제정의실현이니,부패요인 척결따위의 유식한 말이야 먼 산울림으로밖에 들리지않았다.그에게는 그저 박회장의 검은돈이 장마철에 거름 썩듯 폭싹 삭기만을 바랄 뿐이다.
참으로 설움 많던 세월이었다.딸 경아가 시집간지 5년 동안 황대구씨는 사돈이란 작자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거니와 가끔 기별을 넣어도 만나주기는 커녕 흔해빠진 전화 한 통화 없었다.
그러니까 이쪽 사돈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해온 터였 다.사위도 마찬가지였다.체면에 못이겨 명절날에야 겨우 코빼기를 비쳐오던 사위는 지난해 장인이 이잣돈 오천만원을 꾸어달라고 부탁한 뒤로그나마의 발길마저 끊어버린 위인이었다.그뿐인가.시댁의 돈맛에 길든 탓인지 딸년마저 그쪽 며느리가 된뒤로는 친정아버지를 들판허수아비쯤으로 얕잡아보았다.같은 서울바닥에 살면서도 일년에 기껏 한번 찾아올까말까하는 딸년의 거동부터가 아니꼬울 지경이었다.벤츠 뒷자리에 타고와 기사를 시켜 대문 버저를 누르게 하는 거드름이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갈음하는 그 도도한 꼬락서니가 아무래도 내 자식 같지가 않았다.
『저게 내가 난 자식여? 저럴 바엔 새끼를 이쁘게 낳지 말걸.암튼 난 저꼴 못봐!』 황대구씨는 딸에게서 느끼는 역겨움을 마누라에게 내뱉곤 했다.그의 말 중에는 딸이 못생겼더라면 아예사위네 회사 비서로도 뽑히지 않았을 거고 따라서 그집 식구가 안 되었을 거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늘 딸 편이었다.
『구멍가게 장사 이십년에 저 영감탱이가 이제는 소견머리까지 꾀죄죄해졌어.억대 보석반지 끼고 다니는 딸자식을 자랑으로 여기진 못할 망정 눈치만 줘요?그리고 그 애가 이쁘게 생긴 것도 모두 제 복이구 제팔잔데 웬 배알이죠?귀염 받고 호 강하라고 이쁘게 태어났고 부잣집 아들 눈에 든것 아녜요?』 람은 생긴대로 살아야 된다는 아주 평범한 논리였다.아내는 늘 자기를 손해보는 인생으로 여겨왔다.남한테 빠지지 않을 미모로 태어났으면서하필 저런 맹충이 황대구씨와 짝을 맺어 코 묻은 돈만 주무르고있는 팔자가 딱하기만 했다.소시적 에 사돈영감 같은 사내를 만났던들 지금은 뭉칫돈을 주무르는 귀부인이 되었을 것 아닌가.그녀는 지금도 딸의 결혼식날을 생각하면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운동장만한 식장을 가득 메우고도 철철 넘치던 축하객들의 인산인해.마당과 골목을 메우다 못해 팔차선 도로에까지 늘어섰던 고급 승용차들의 차산차해.거기에 비해 자기네 축하객들의 후줄그레한 꼬락서니.오죽해야 결혼식을 치르지 말고 딸을 그냥 보자기에 싸가기를 내심 바랐을라고.
『현금으로 숨길 수밖에 없어.』 아내와 함께 실명제에 대한 텔리비전 토론 프로를 보고 있던 황대구씨가 단안을 내렸다.실명제 실시 이후 장사로 번 돈만 해도 팔백만원.거기다 적금 탄 돈 이천오백만원을 합치면 모두 삼천삼백만원이 넘었다.그 돈을 은행에 넣었다가는 통 장액수가 모두 일억원을 넘게 된다.계좌를아내와 아들의 이름을 빌려 세개로 쪼갠 덕에 실명전환이야 어렵지 않다지만 아내나 아들 계좌에는 더 이상 돈을 넣을 수가 없었다.그리고 매일 순이익이 삼십여만원씩이나 되니 한달만 지나도팔구백 만원이 넘게 모아지는 데다 아무리 실명이라 해도 예금액이 탄로나게 되면 당장 일반과세로 세액책정이 달라지고 그동안의소득탈루가 들통날지도 모를 일이었다.내막적으로는 판매 외형을 줄여 아직 과세특례자로 버티고 있지만 어서 돈을 빼내어 예금고를 줄여야 될 판이었다.더구나 신고기간이 끝나면 고액 예금자에대한 뒷조사가 있을지도 모를 일.
『내 가슴이 이렇게 뛸 정도니 박회장 간이야 오죽이나 탈까?』 ***황 대구씨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로 이죽거렸다.
그 말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달래보려는 자위임에 다름아니었다.
자기가 열 만큼 애를 태우면 박회장은 백만큼 애를 태우리라는 재미,그 재미로 위로를 받고 싶어 한 말이었다.아내 역시 그말에는 꼬투리를 달지 않았다.탈세에 대한 걱정은 남편이나 마찬가지였다.외형대로 세금을 내자니 애쓴 만큼의 수입이 못될 거고,그렇다고 세금 때문에 장사를 걷어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얼마나 고생하며 일으킨 업소인가.먹을 걸 못먹고 쓸 걸 못쓰고 동전까지 챙겨모아 일으킨 사업체가 아닌가.말이 구멍가게지 목 좋은 네거리 코너에 공산품은 물론 야채.과일등 농산물에다 김밥.떡같은 간이 음식매장까지 차려져 웬만한 슈퍼를 뺨칠 정도였다. 『돈 버는 것도 그래요.
쉽게 버는 장사라면 세금을 에누리 없이 낸들 뭐가 억울하겠어요? 하지만 우리집 장사는 지금 벌이로도 할까말까하는 장사 아녜요? 밤을 새우기가 일쑤인데다 새벽마다 야채시장을 뒤져야 되고 아침부터 쉴참도 없이 김밥을 말고 손님을 받아야 하니 맘 놓고 잠잘 때가 있어요,남과 같이 놀때가 있어요.그런데도 벌이가 좋다고 세금으로 거둬가면 적게 먹고 편히 살지 뭐하러 이 고생을 해요.야채와 김밥장사만 집어치워도 몸이 편할 것 아녜요? 매상이 반의 반으로 줄테니 세금 걱정 안해도 좋고.』 『딴소리 말고 돈 숨길 데나 의논해.그래 어디다 숨기면 좋겠소?』***담 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던 황대구씨가 조용히 말했다.그는 아내의 오기스런 말이 헛소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매상을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금으로 왕창 뜯길 수도 없거니와장사 포기는 더더욱 안될 말이었다.
『도둑이 들어와 뒤져도 들키지 않을 장소라면? 그럼 보자기에싸서 지하실 창고에 쑤셔두죠 뭐.』 아내가 머리를 짜냈다.
『그건 옛말야.요즘 도둑은 약아서 허술한 데부터 뒤진다는 거야.』 『방 천장에 구멍을 낼까요?』 『그것도 표가 나지.』 『헌 이불 속에 판판히 깔아서 개두면 어떨까요?』 『만져보면 당장 알아.』 『그럼 항아리에 담아 마당에 묻죠.삼천이백이면 만원짜리 열 다발씩 세 뭉친데 우리집 된장독만하면 십상일거예요.』 『남들은 스덴판으로 통을 만들어 마당에 묻는다는데?』 『스덴보다야 질그릇이 났죠.암튼 묻는 수밖에 없어요.우리같은 처지에 대형금고를 둘 수도 없고.』 『그러지.일년치씩 묻어두면 삼년이면 항아리가 세개,오년이면 항아리가 다섯개,그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다보면 무슨 수가 생기겠지.그런데 동주한테는 어떡한담?』 『알려야죠.곧 대학을 졸업할 자식인데 알려 마땅하죠.동주는 착실한 애라 돈 훔쳐낼리도 없을 테니.』 아내의 말에 황대구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튿날 그들은 돈을 항아리에 담아 밀봉하고 마당 구석을 파기시작했다.뗏장을 걷어내고 항아리를 묻은 다음 다시 덮을 참이었다.땅은 황대구씨 혼자 파고 아내는 이웃 사람을 망보았다.그런데 항아리 깊이로 땅을 거의 팠을 무렵 학교에서 동주가 돌아왔다.그는 마당을 파는 부모의 수고를 보자 웃음부터 터져나왔다.
『돈을 은행에 두셔야지 땅에 묻으면 어떡해요.정당하게 세금을내고 맘 편히 사셔야죠.』 동주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 이짓 하냐? 이할도 안남는 장사에다 외상돈떼이기 일쑨데 세금에 다 빼앗기고 뭔 재미로 고생해?』 『그래도 먹고 쓸만큼은 남겨두겠죠.나라가 뭐예요.국민을 보호하는 기관이잖아요?』 『너 참 똑똑하다.네가 대학생이라고 입바른 소리하는 모양인데 세금 내라는대로 다 내고 장사해먹을 작자 뉘 있겠냐? 장사란게 너희들 산술처럼 딱딱 아귀맞는 줄 아니? 계산은 남지만 손에 안 쥐어지는게 장사여.너 그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어떻게 사회에 나갈 참여?』 황대구씨는 점잖게 아들을 꾸짖었다.동주는 아버지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도 같고 틀리는 것도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때였다.대문 버저소리가 들렸다.황대구씨는 삽자루를 놓고 조심조심 대문쪽으로 걸어갔다.그의 다리가 몹시 떨렸다.만약 남한테 마당 파는 모습을 들키면 돈 감추는 방법을 바꿔야 될 판이었다.그는 대문 틈으로 바깥을 살피며누구냐고 물었다.
『저예요.』 바깥 대답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경아였다.황대구씨는 생각지도 않은 딸의 갑작스런 내방에 몹시 당황했다.
『뭘 하시던 중이죠?』 ***마 당에 들어선 경아는 아버지의당황하는 모습과 흙더미 옆에 멀쭉이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번갈아보며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었다.현관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동생의 인사도 무시한 채 먼저 항아리부터 살폈다.뚜껑 속 아가리를 비닐로 틀어막 은 항아리.
『오오라.이제 알겠네.돈을 묻으시려는 거죠? 집집마다 난리라던데 이 집도 예외는 아니군요.』 『그 수밖에 더 있냐?』 어머니가 대꾸해 주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돈이 없는 집들이 더 야단들예요.시아버님은 그저 태평히 웃고만 계시거든요.』 『네가 그 집에 수백억있는 걸 어떻게 알아?』 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엇보다 친정을 이 집이라고 하대하고 시집을 우리집이라고 정답게 부르는 딸년의 말투가 아니꼬웠다.
『제 몫으로 감춘 돈만 해도 몇십억인데요?』 『그럼 그 돈을어디다 숨겼냐?』 『그건 못가르쳐드려요.우리 아버님 말씀에 목숨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남한테 말하지 말랬어요.』 『내가 남이냐? 나는 네 진짜 애비여.그러니 우리도 감쪽같이 숨기는 법을 알아야 되잖여?』 『이집 돈은 푼돈이니까 마당에 묻어도 괜찮을 거예요.』 『뭣이 어째? 요년.』 찰싹! 경아의 뺨에 손가락 자국이 벌겋게 돋았다.그런데 딸의 뺨을 때린 손이 공교롭게도 아내의 손이란 데에 황대구씨는 그저 벙벙할 뿐이었다.한참만에야 그는 다시 삽을 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아내가 화를 대신 풀어주자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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