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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42.정래혁투서사건 5공 도덕성 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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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의.도덕.청렴은 통치권자에겐 매력적인 단어다.집권과정이 비정상적일때 더욱 그렇다.5.16의 朴正熙정권이 그랬고, 5.17의 全斗煥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집권의 명분을 정의사회 또는 부정부패추방에 걸었다.
그러나 그같은 슬로건은 부패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곧 정도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고 곧잘 멍에로 작용한다.5共정권이 李哲熙.張玲子사건으로 순식간에 통치기반이 휘청거릴만큼 타격을 입은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도덕정치를 부르짖었기 때문 이기도 했다.84년6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丁來赫 民正黨대표의 축재 투서사건은 내용의 본질보다 집권세력의 도덕적 체면때문에 이상하게뒤틀린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5共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낸 金忠男씨는 권력의 이같은 속성을『도덕정치와 부머랭의 효과』라고 규정한바 있다.
이른바「丁來赫대표사건」은 丁씨와 선거구가 같은 합참의장출신 4성장군인 文亨泰씨의 투서에서 비롯됐다.3共시절 和順-谷城-潭陽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文씨는 丁씨가 5共정권에서 자신의선거구를 차지해 국회의장.여당대표를 하고 있는 것에 깊은 경쟁의식을 느꼈다.두 사람은 이미 세상이 다 알 정도의 견원지간이었으며 오랜 미움의 행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文씨의 투서가 처음 청와대.안기부.民正黨에 보내진 것은 84년6월13일이었다.발신인이 민정당원으로 돼 있는 투서는 丁씨가각종 투기를 해 모은 부동산등 재산이 1백78억원대에 이르러 丁씨를 그대로 공직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대통령 과 民正黨에 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또 투서는 각 언론기관에도 우편배달됐다. 청와대와 民正黨은 긴장했다.丁대표가 아무리 힘이 없다지만 집권당의 2인자 자리에 있어 사실여부를 규명하지 않을수 없었다.안기부가 조사에 들어갔다.民正黨의 權翊鉉사무총장이 15일 丁대표에게 투서접수사실을 보고 했다.丁대표는 대뜸『文 亨泰의 짓』이라고 단정했다.동시에 丁.文간의 오랜 惡緣이 화제가 되면서「별들의 전쟁」이란 말이 생겼다.文씨는 4성.丁씨는 3성장군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재(광주서중)라는 소리를 듣고 일본 육사를 나온 유복한 가정출신의 丁씨(谷城)와 일본 지원병 출신으로 빈농의 자손인 文씨(和順)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丁씨(육사7특)는5.16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朴正熙의장으로부터 자기관리가 철저하다고 하여 최고위원에 임명돼 상공장관을 지냈다.文씨(육사2기)는 軍작전통으로 다양한 야전경력을 朴대통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비슷하게 진급해온 두사람은 국방장관자리를 놓고 한차례 해프닝을 벌인후「소 닭보듯」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합참의장시절 文씨는 차기 국방장관에 자기가 될것으로 판단,운전병에게 장관 자동차를 미리 점검시키기도 했으나 국방장관자리는 이 미 예편해韓電사장이었던 丁씨에게 돌아갔다.정치쪽에서는 文씨가 고향의 지역구(和順-谷城)를 선점했고 丁씨는 서울(城北)에서 출마해 9,10대의원을 지냈다.5.17은 두사람의 명암을 다시 갈라 文씨는 정치규제를 당하고 丁씨가 선거구를 고향으로 옮겨 당선됐다.투서 넉달전인 2월25일,정치해금이 되자 文씨는 지역구 탈환의 의욕을 보이면서 丁씨에 대한 투서를 결행한 것이다.
투서를 접수한지 닷새만인 18일 權총장은 청와대에 올라갔다.
당시 상황에 대한 청와대 비서관 출신 Q씨의 증언.『民正黨은처음 대수롭게 보지 않으려 했어요.權총장은 묵살방침을 건의했었지요.全대통령도 民正黨의 방침을 경청하는듯 했지요.丁대표가 심각한 상황까지 갈것으로 보지않던 것도 당연했구요 .무기명 투서는 불문에 부치고 투서인을 가려내 처벌한다는 분위기가 정부내에자리잡고 있었거든요.그러나 증빙서류.사진까지 붙은 투서가 언론의 추적대상이 되자 사태는 급반전하고 말았어요.축재자체는 상당부분이 사실인데 언론이 안쓸리 있겠 어요.全대통령은 盧信永안기부장에게 투서의 사실여부를 확인해 빨리 보고토록 지시했습니다.
』 투서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파문은 丁.文 양자관계에 그치지않고 권력의 도덕성 쪽으로 번져갔다.23일 全대통령은 안기부의보고를 받고 丁대표를 경질하려 마음을 먹었다.丁씨를 그냥 두었다가는 여론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고 丁대표 의 1백억원대재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다는 것이 全대통령의 판단이었다.全대통령은 丁대표의 면담신청을 취소하고 25일 陸士동기생이기도한 權총장을 후임대표에 임명했다.
청와대 참모들과 안기부는 처음 丁대표의 공직사퇴,그리고 文씨구속으로 처리방향을 잡았다.丁씨를 권력에서 내모는 조치로 집권세력과 부패의 연상효과를 차단하고 文씨에 대해선 투서의 음해성을 들어 혼낸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여론은 그런 처 리방식을 비판했고 丁씨가 상징하는 軍출신,권력 지향성,지역성 문제는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26일 文씨등 투서관련자 7명을 검찰이 불러 조사하자『신고인만 잡아가느냐』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됐다.괘씸죄로 文씨만을 구속해가지고는 여론을 납득시키기가 곤란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文씨의 투서가 비열하다는데는 이의가 없었지만 정변.정권교체에도 불구,권력의 陽地에 머무르고 있는 丁씨에 대한 시기심,군사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묘하게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러자 청와대 내부에서도 진통이 있었다.柳興洙정무2수석비서관은 『文씨 구속이 국민감정과 거리가 있다.두사람을 비슷하게 다뤄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82년12월 許和平씨가 그만둔뒤全대통령은 비서관들의 업무영역을 조정해 법률.국방 분야를 정무1수석실에서 떼어 2수석실에 맡겼었다.全대통령은『무슨소리냐』고역정을 내기도 했다.그러나 全대통령은 盧信永안기부장.裵命仁법무장관.金錫輝검찰총장,鄭順德정무1.柳정무2.李鶴捧민정수석등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국민감정상 두사람의 처리에 형평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다수의견이었고 우선 金검찰총장이 그런 복안을 갖고 있었다.사건의 파문을 줄이기 위해 文씨를 풀어줘 여론의 관심사자체를 빨리 없애는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Q씨의 이어지는 증언.
『全대통령으로서는 파문이 정권의 도덕성 쪽으로 번지는 것이 싫었을테지요.丁대표야「고용사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심정적으로는 文씨의 음해행위에 분개했었어요.그러나 文씨를 구속하면 더 시끄러워진다는 건의에 마음을 바꿨지요.全대통령■ 그 러면서 李.張사건때 처삼촌 李圭光씨를 구속한 것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더군요.「李圭光씨에 대해 두 許씨를 비롯,전부 구속해야 한다고했지만 李鐘元법무장관만은 달랐었다.구속하지 않는 수습방안이 옳았을지 모른다」.全대통령은 李씨를 구속 해 일시적인 결백성과 청렴도를 보였지만 그것이 결국 부머랭이 돼 정권에 부담이 된다는 점을 깨달았던것 같아요.』 ***故鄕사람도 등돌려 文씨를 형사처벌하지 않으려면 丁씨의 고소취하 동의절차가 필요했다.명예훼손은 反의사 불벌죄이기 때문이다.
29일 오전 李健介서울지검 공안부장은 果川의 丁씨 집을 찾아가 사건의 빠른 진화를 강조하며 소를 취하해줄것을 설득했다.
곧이어 丁대표의 의원직사퇴와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하는 성명서가 발표됐다.검찰은 대신 文씨에게 정치활동 포기를 약속하는공개사과문을 발표케 했다.두 사람은 여러모로 추악한 별들의 泥田鬪狗만을 보여주었다.5共 신군부로서는 두사람 모두에게 별로 애정이나 애착이 없었다.
丁씨는 당시를「고립무원」상태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그는 청렴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5共의 정치적 속죄양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때 여론은 丁씨를 공직자 투기의 전형으로 비난했다.
5共 신군부가 꼴보기 싫은 다수 국민들은 丁씨를 두들김으로써대리만족을 느끼는 측면도 있었다.그것이 적법절차에 의한 재산증식이었는지 투기였는지 자세히 따져보기보다는 꼴보기 싫은 民正黨이 망신당하는게 통쾌했다.그런 가운데 丁씨가족들 은『월급.퇴직금을 아껴 사둔 땅이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값이 올랐다』고 항변했지만 들리지 않았다.공직자가 재산이 많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잘 해명되지 않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26面에 계속 ***25面에서 계속 丁씨의 지역구에서도여론은 대체로 동정적이지 않았다.金大中씨가 정치판에서 밀려나고「5.18 광주」를 겪은 호남사람들은 몇몇 호남출신이 5共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대해 내심 냉소적이었다.丁씨를 5共의첫 국회의장에 임명하고 민정당대표로 앉힌 것이나 金相浹.陳懿鍾씨를 총리에 발탁한 것까지 같은 맥락으로 보는 분위기였다.그런정서에서 丁씨가 낙마하자 호남여론은 역시『1회용 반창고였다』며『5共정권의 본질을 모르고 덤벼 당했다』고 빈정대는 편이었다.
***“역시 1회用반창고” 舊공화당의 3共세력들도 그가 청산위원장이 되어 공화당 재산을 신군부에 넘긴 것에 불만이던차 그의 몰락을 고소해했다.丁씨가 민정당에 들어간 것은 혈혈단신의 지역배려 케이스였다.
그는 全대통령등 신군부들과는 군시절 함께 근무한 적이 없었다.정규4년제 첫입학생인 全대통령의 11기들이 시험볼때 그는 대령으로 호남출신 응시자 전형 책임자였을 뿐이었다.3사단장시절 소대장이던 11기들을 처음 만났지만 거기에는 李基 百소위가 끼어있을 정도였다.
丁씨는 5共이 끝난뒤 88년3월『헌납재산은 정치권력에 의해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고 소송을 냈다.
성명서에서 재산의 사회 환원이란 대목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작성된 것이며 고도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부정축재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다.
당시 李相宰사무차장.崔永喆의원등이 자신에게 찾아와 압력행사를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丁씨는「하늘에 맹세코 부정에 의한 축재가 아니다」고 쓴 성명서가「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로 둔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前민정당의원 Z씨는 반박하고 있다.
『崔永喆의원이 全南 동향인 丁씨에게 설득대표로 찾아갔지요.丁씨는 그에게 앞으로의 문제를 의논하다가 공직사퇴와 함께 부정축재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해달라고 부탁했지요.崔의원은 이 내용을 黨중집위원회에 회부했지요.그러나 많 은 의원들이「하늘에 맹세코…」라는 대목은 안되겠다고 했지요.결국 사회환원이란 표현으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崔의원이 전화로 丁씨의 동의를 받아 고친 것으로 압니다.』 丁씨의 재산반환소송은 대법원에서 패소했다.그는 같은 이유로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출,계류중이다.
***“빼앗긴것” 88년소송 당시 민정당 분위기에 대한 Z씨의 기억.
『민정당의원들은 대다수 丁씨를 비난하고 여론앞에 겁을 먹었어요.일부는 丁씨를 그냥 두고는 民正黨의 도덕성을 변명할수 없다고 했지요.중집회의에서 신군부 출신 의원들이 더 열을 올렸지요.』 정치적 재기를 노리던 文씨의 꿈도 사라졌다.文씨 주변에선박수를 쳤지만 고향 인심은 동향 출신간의 더러운 싸움이 창피하다고 했다.
『文씨는 신군부의 분위기를 잘못 읽은 셈이지요.丁대표가 꼼짝없이 당할 것이라는 계산은 맞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몰락으로 연결될지는 몰랐지요.군선배들을 인정하지 않는 신군부들에게 두사람의 대립은 치사한 싸움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지요 .文씨는 자신을 호남의 얼굴마담으로 기용할 것으로 믿었겠지만 빗나갔지요.
』(Z씨) 어쨌든 이 사건으로 민정당은 당서열 2위인 대표에 비로소 實勢를 앉히게 됐다.
『全대통령이 權총장에게 대표를 맡으라고 했을때 權총장은 盧泰愚.金貞烈씨를 대신 추천했다고 해요.그러나 全대통령은 선거를 앞두고 원외에 있는 사람은 곤란하다며 맡으라고 했지요.全대통령은 73년 尹必鏞사건으로 예편된 하나회동기 權총장에 게 빚졌다는 기분을 갖고 있었습니다.그때 자기와 盧대표는 살아남고 權총장은 옷을 벗었거든요.또 權총장의 치밀함과 추진력을 평가했고 5共초기 두許씨에 의해 견제받은데 대한 배려도 작용했을거예요.
』 민자당의원 T씨의 설명이다.
***正統性문제에 교훈 그러나 權대표의 民正黨 간판부상은 올림픽조직위원장을 하던 盧泰愚씨를 긴장시켰다.
『물론 全대통령이 權씨를 대표에 임명한 것은 정치권에서 키워주려는 것이었지만 盧씨가 늘 염두에 두어왔던 후계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요.그렇지만 權씨가 당권의 칼을 쥔만큼 두사람의관계는 보이지 않는 긴장분위기가 조성되었고,얼마 안있어 12대총선때 盧씨의 지역구출마 문제로 1차 대립합니다.권부의 분위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權씨한테 몰리기 시작했지요.』(T씨) 丁來赫사건은 권력초기의 정치구호가 국민기반이 없을때는 순식간에 허망한 운명에 빠지기 쉽다는 교훈을 남겼다.
정의사회구호는 정통성과 정권 내부의 자기혁신이 뒷받침되지 않는한 생명력을 가질수 없기 때문이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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