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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사물과 인간통해 시간의 흐름.정지 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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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간의 흐름과 정지라는 문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고있는 두 편의 시가 이 달의 시들 가운데 눈에 띈다.우리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오규원씨의「잡풀과 함께-황동규에게」(『작가세계』가을호)와 황지우씨의「살찐 소파에 대한 日 記」(『상상』가을호)로서 전자가 정지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을 통해 흐르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면,후자는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인간을 통해 정지된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잡풀과 함께-황동규에게」의 주된 이미지는 잡풀이다.어떤 의미에서 보면 잡풀이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자연의 일부일 수도 있고,역사의 흐름에 비켜선 민중일 수도 있다.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잡풀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쇠비름이 파고 든다/시간과 시간에 밀려/잎과 잎 사이의/거리가 벌어진다/시간과 시간 사이의/쇠뜨기가/살갈퀴가/엉겅퀴가/지하의 물길을 바꾼다/물소리가 다른 방향을/파고 지상을 온다』에서 보듯이 잡풀은 세계의 질 서를 바꾸기도 하고,구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편입시키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구체적인 시간으로 변용되는 바로 이 순간,극히 미미한 것에서 우주적 질서를 확인하는 이 순간이 다름아닌 시적 통찰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시의 부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잡풀과 함께」「도깨비바늘들」과 「함께 붙어서」「시간과 시간 사이를」지나가는 사람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역사와 시간을 비켜가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역사와 시간속을 살아가는「한 시민」의 모습을 이 시는 간결한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살찐 소파에 대한 日記」는「소파에 앉아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나」를 그린 시다.
이 시에 반복되어 나오는 이미지중 하나가「괘종시계」인데,「나」는「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고」있다고 느끼기도 하며 「분침과 시침을 벌려/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든다」고 느끼기도 한다.요컨대「나」의 의식세 계는 하루 종일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그러나 그 시간은 정지된 시간 즉「植物人間」의 시간이다.결국 시간에 대한 의식은 시간의 정지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인 것이다.
무기력이 지배하는 절망의 시간은 자신을 수족관 속의 물고기에비유하는 다음 구절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내가 손대지 않은 無垢한 시간을 뜯어먹는 누에가/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동안/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橫 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열대어 화석처럼 박혀 들어왔을 때/나는 내가 담겨있는 空氣族館을 느꼈다/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시인이 이처럼 집요하게「화석처럼 박혀 들어」오는 정지된시간과 대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는 곧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짓 아닐까.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절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볼 도리밖에 없지 않은가.
시인은 냉정한 시선과 힘 있는 언어를 통해 그 절망의 밑바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우리 모두가 그 밑바닥을 체험해야 할「가련한 空氣族들」은 아닐까.
張敬烈〈문학평론가.서울大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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