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탐구>46.민주당 김영배 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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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忠南論山출생(59세)▲永登浦공고.高大경영대학원▲新民黨당기위원장▲통일민주당.平民黨사무총장▲平民.新民黨원내총무▲民主黨최고위원▲10,12,13,14代의원(서울陽川乙) 요즘 民主黨의 각종활동을 찬찬히 살펴보면 국정조사와 같은 진행형 현안이 아닌데도당력을 쏟아부으며 정성을 들이는 분야가 눈에 띈다.
바로 지난 73년의 金大中東京납치사건 진상조사다.金前대표가 비록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黨內 영향력이 여전히 절대적이다보니그만큼 공을 많이 들이고 있음을 알수 있다.
바로 그점 때문에 民主黨쪽 인사라면 누구나 탐을 낼 이사건 진상조사위의 위원장을 지난 3월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낙선한 金令培의원이 맡아 다소 의아심을 자아냈다.
위원장선정이 발표된 최고위원회의석상에서 한 최고위원은『조사위원장직은 최고위원급이 돌아가며 맡는게 관례』라며 강력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그 자리를 둘러싼 신경전이 치열했다.
金의원은 이로써 지난해 韓峻洙 燕岐군수의 관권부정선거고발 진상조사위원장.정보사부지 부정사건조사위원장에 이어 2년간 세차례굵직굵직한 조사활동을 이끌게 됐다.
金의원의 이번 위원장직 임명은 李基澤대표나 최고위원회의가 영향력을 행사한게 아니라 金大中前대표 자신이 희망해 결정됐다는게당내인사들의 은밀한 전언이다.
金前대표가 그를 두텁게 신임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관계자들은설명한다.
忠南論山출신으로 東橋洞직계도 아닌 그가 DJ의 신임을 얻게된것은 지난87년 新民黨 내홍이 계기가 됐다.
당시 新民黨은 李敏雨총재의「민주화7개항구상」파동으로 한차례 내부갈등을 겪었으며 그에 이어 직선제개헌 黨論에 배치되는 내각제주장을 펼쳐온 李哲承.李宅熙씨의 징계문제에 부닥쳐 최대위기를맞았다. 金泳三.金大中 두金씨는 두李씨를 제명키로 하고 당기위에 즉각 처리를 지시했으나 당기위 관계자들이 질질 끌어 진척을보지못했다.
5共말기였던 당시에는 친위쿠데타說과「판쓸이」소문이 무성했던 혼란기였고 兩李씨를 제거하는데 따를 부담과 불이익을 누구도 우려치 않을수 없는 분위기였다.
다급해진 兩金이 여러 의원에게 이 문제의 처리를 요구했으나 대부분 固辭했다.당시 당기위원장은 東橋洞系 몫으로 金大中씨는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非주류에 속해있던 金令培의원(당시 훈련원장)에게 간접제의를 했다.이때 金의원은 두말없이「 해보겠다」고선뜻 수락했고 李宅熙씨를 제명하는 선에서 책임을 완수했다.
이과정에서 폭력배까지 동원돼 당사점거농성이 벌어지는등 진통도컸다.당시 DJ가『金令培가 덜렁 자빠지면 큰일이다.權魯甲이가 과거 권투를 좀 했으니 도와주도록 하겠다』고 거들 정도였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金의원은 李哲承씨 자택을 방문,담판을벌였고 黨반대파의 점거농성으로 험악한 분위기속에 당사로 들어가당기위를 소집하는 뚝심을 과시했다.결국『당기위조차 제대로 소집못할 新民黨갖고는 직선제개헌투쟁은 안된다』는 兩金의 新黨창당회동 명분에 金의원이 일조를 한 셈이다.
金의원은 이때의 功을 인정받아 통일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됐으며,6.10항쟁당시 자동차안에서의 전단살포등 기발한 아이디어로DJ의 신임을 한층 두텁게 했다.
90년 3黨 통합직후엔 平民黨원내총무직을 맡아 뚝심으로 巨與와 맞서 나갔다.金총무에게 내려진 DJ의 지상과제는『의석수에 관계없이 여야관계를 1대1로 확립하라』『내각제개헌을 저지하라』『지방자치제를 끝까지 관철하라』는 3개항.
10개월여 金潤煥 民自黨총무와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그해 11월 내각제 개헌추진중지.地自制실시등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냈다.당시 金大中총재가 오랜만에 밝게 웃던일이 생생하다고 金의원은 회상한다.
金의원은 5.16이후인 63년 당시 야당의 永登浦지구당 부장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이래 지금까지 30년을 야당생활만 해온 골수야당인이다.
당초 서울시위원장이던 金在光의원과의 개인적 연으로 盧承煥 前국회부의장과 함께 非주류 金在光系에 몸담았으나 87년 당기위원장 수락이후 東橋洞系로 옮겼다.그때 盧前부의장도 동행했다.
야당총무.총장에 이어 통합 民主黨의 최고위원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던 金의원은 지난 3월 전당대회에서 예상밖의 최하위로 최고위원 경선에서 낙선,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다.
그는 당초『1~2위 당선이 무난하다』고 점쳐지는등 선두주자였으나 안정권으로 꼽힌게 오히려 票분산을 불렀고 이상과열로 인한지역정서 재현등으로 결국 고배를 들었다.
李基澤.金相賢의원의 조직과 연계를 않고「중부권역할론」을 주창한 한계도 새삼 실감하고 있다.지난 대선에서 DJ 忠淸득표율이12%에서 28%로 상승하고 자신의 고향인 論山에서는 승리를 거둔 점을 외면한 대의원들에게 때론 야속한 생각 도 든다고 털어놓는다.
독특한 日本 사무라이를 연상케하는 외모와는 달리 金의원은『돌다리도 X레이 찍어보고 건넌다』는 신중파다.업무처리에 치밀하고조직관리의 명수로 불리기도 하지만『미래에 대한 철학 과 비전이부족하다』는 평도 뒤따른다.
어린시절 서당에 다니면서부터 시작한 서예솜씨로 국회書道會부회장을 맡고있다.총무시절에는「義者必勝」「松無古今色」등의 자필 휘호액자를 야당의원 전원에게 보낼만큼 자신의 솜씨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전당대회 충격이후 침묵을 지켜오던 그는 요즘 DJ납치조사위원장직을 맡아 활기를 되찾고 있다.
특히 金泳三대통령이 내각에 자료협조를 지시했고 日本정계에서도韓日공동조사단구성등 적극적 자세로 나와 더욱 신바람을 내고있다. 金의원은 곧 日本과 美國을 방문할 계획이며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李厚洛씨의 증언과 무임소장관이던 李秉禧씨의 외교대화록 입수등에 총력해 기필코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헌정사상 최대의 정치테러사건인 만큼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崔 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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