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억원서 3억원으로 「추락」 박정훈(의원탐구: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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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산신고 낙폭 1위/달라진 규정따라 변호사 부친 재산 빼버린탓/「6·3」주역… 50대 초선 늦깍이
민주당 박정훈의원은 지난 11일 마감된 공직자 재산등록에서 여야의원들 가운데 신고재산의 낙폭이 가장 큰 의원이다.
지난 4월의 민주당 재산공개때 44억8천만원을 신고해 당내 10위를 차지했으나 공직자윤리법에 따른 신고액은 그것의 15분의 1인 3억1천만원 밖에 안되 중하위권으로 떨어졌다.
부양가족이 아닌 직계존속의 재산을 뺄 수 있도록 한 법규정 때문에 부친 박세경변호사의 재산 38억원을 빼버렸기 때문이다.
『재산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니 여기저기서 손을 벌려요. 게다가 지난 4월의 공개때는 어쩔 수 없이 부친재산을 내 명세에 올렸는데 3남2녀의 형제들 사이도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이것 참….』
박 의원은 지난해 총선때 민주당의 전국구 후보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는 64,65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나섰던 이른바 6·3세대의 학생운동가 출신이다.
김덕용 정무1장관,김덕규 민주당 사무총장,김도현 평통 사무차장,이명박 민자당의원,현승일 국민대총장 등과 함께 6·3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고대 정경대 학생회장이던 64년 ROTC를 하면서 대학졸업반으로 「6·3」의 거대한 물줄기를 주도했다.
그가 맡았던 역할은 전국 정외과 대학생들이 반정부 연합체인 「구국항쟁 전국대학생 총연맹」의 위원장.
6·3하루전 그는 고대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감행함으로써 타대학의 동참을 유도해냈고 이어 6·3 당일은 고대에 「박 정권하야 구국투쟁위원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정권타도 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위원회의 구성원들이 그외에는 최장집 현 고대교수(당시 기획위원장),김덕규 민주당 사무총장(당시 선전위원장),이명박의원(당시 상과대 학생회장) 등이다. 박 의원은 경찰의 수배를 받았지만 용케 추적을 피했으며 이 의원이 잡히는 바람에 그가 주모자로 몰려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김 정무1장관 등이 시위를 주도했다.
박 정권이 3선개헌을 추진한 69년 그는 또 다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4·19세대로 3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선 이기택 민주당대표와 함께 「4·19,6·3 범청년 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거기서 이 대표는 대표최고위원을,그는 최고위원을 각각 맡았으며 최형우 전 민자당 사무총장이 사무총장,그리고 김 총장,김상현·조홍규의원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6개월후에는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출범하고 그는 6·3세대의 준비위원으로 가담했다. 이 범국민투위는 야당인 신민당·재야인사·군소정당·독립유공자·종교계 등 각계의 반공화당 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위원장은 재야의 김재준목사가 맡고 장준하씨가 선전위원장,이철승씨가 조직위원장,야권의 양일동씨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박 의원은 의사결정기구인 11일 운영위원에 최연소자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김영삼·김대중씨와 김재광씨 등 거물급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활동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얼마나 심했던지 중정의 조사가 끝난뒤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옷을 벗으려고 할때 바지에 피가 엉겨 제대로 벗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후에도 툭하면 강제연행·투옥 등 숱한 고초를 겪었으며 그중에서 그의 부친과 같이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던 일은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서 신군부는 DJ사건의 변호를 맡으려던 민권변호사인 부친 박씨를 「동교동에서 DJ와 식사를 같이 했다」는 사실만으로 연루시켜 투옥했다. 박 의원도 같은 사건으로 수배를 받다가 뒤늦게 붙잡혀 담을 몇개 사이로 두고 부친과 옥살이를 함께 했다.
『군사법정에 재판을 받으러 가는데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포승에 묶여오기에 무슨 죄가 있어 저렇게 됐나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보니 바로 아버지였어요.』
그러나 그의 민주화운동 경력만큼 정치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전국구 초선인 그를 주위에서는 정치의 운만 잘탓으면 몇선의 관록이 붙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가 정치권에 몸담게된 것은 30세인 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진산 신민당 당수의 공천을 받아 영등포 갑구에 출마하면서부터.
진산이 후보등록 마지막날 지역구를 박씨에게 물려주고 전국구로 등록해 유명한 「진산파동」을 낳은 사건에 간접 연루되어 한때 본의아닌 오해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첫 출마에서 5만5천표를 얻는 선전을 했으나 정부의 총력지원을 받은 공화당의 장덕진씨에게 2만5천표 차이로 패했다. 장씨는 박 대통령의 처형의 사위로 촉망받는 관료 엘리트여서 정부와 공화당의 전폭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두번째는 77년 종로­중구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오제도·정대철씨에게 졌다.
DJ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됐다 풀려난후 피선거권의 박탈 등으로 정치권을 한동안 떠나 경기고선배인 김우중회장의 배려로 대우이사로 기업에 전신했다.
그러다 14대 총선을 앞둔 91년 김 회장의 정치권유로 다시 정계에 돌아왔다. 『6·3세대의 정치이념이라고 할수있는 민족적 민주주의 실현에 몸을 던질겁니다. 특히 기업에서 배운 현장 경제경험을 의정(민주당 상공자원위 간사)에서 펼치는데 최선을 다할 작정이에요.』<박영수기자>
□박 의원 약력
▲전북 임실출신(51) ▲고대 정외과 ▲구국항쟁 전국대학총연맹 위원장(6·3사태) ▲4·19,6·3범청년 민주수호투쟁위원회 최고위원 ▲대우기획조정실 상무 ▲14대 전국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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