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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2·l2때 장이 목숨걸고 도왔다" 전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전 대통령은 시원시원하고 스케일이 큰 이 장관에게 적지 않은 인간적 매력을 느꼈다. 81년 말 통일원장관이던 그를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은 두 허씨에게 제동 걸라는 취지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청와대 비서관 출신 민자당 의원 F씨의 기억.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했을 때 그가 통 크고 억세다고 해서 두 허씨를 통제할 수 있다고 전 대통령은 본 것이지요. 그후 이 장관은 외무부를 맡아 노부장의 뒤치다꺼리를 마치고 외교문제에 이니셔티브를 잡으려고 의욕을 보였어요. 전 대통령도 그의 역할을 새롭게 평가했었구요.』

<경호실무자만 사표>
경호·정보 최고책임자는 문책이 없었으나 담당 실무자들에겐 책임을 물었다. 아웅산 뒷수습을 마치고 나중에 귀국한 천병득 경호처 장은 장 실장에게 사표를 냈다. 천 처장의 사표수리문제로 경호실이 뒤숭숭했다. 그때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을(11월12일)앞두고 미국의 경호 선발대가 한국을 다녀갔다. 부인 낸시 여사는 아웅산 폭파를 듣고『서울에 가지 말자.』고 불안감을 표시했다는 얘기가 우리한테 입수되었다. 경호실은 내부갈등으로 비춰질까봐 레이건 방문 때까지 천 처장의 사표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12월에 천 처장의 사표는 수리됐다. 경호실이 그렇게 조치하자 안기부도 상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선발대로 버마에 갔던 이상구 국외담당국장(현 말레이시아 대사) 등 실무자 4명이 그만뒀다. F씨의 지적. 『세계외교사상 전대미문의 사 건을 놓고 실무자만 책임을 물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런 인사는 대통령주변 분위기를 과잉충성 쪽으로 몰수밖에 없었어요. 장 실장·노 부장 모두 통치권자를 편하게 해주는 완벽주의형이나 고언·직언 하는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그런 타입에 신임이 집중되고 그들에게 힘이 모이면서 직언과 다양성이 차츰 없어졌다고도 볼 수 있지요.』
노 부장·장 실장에 대한 전 대통령의 신임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전 대통령은 85년2·12 총선 직후 국무총리에 노 부장, 안기부장에 장 실장을 각각 임명해 집권 후반기를 꾸려나갔고 두 사람은 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함께 후계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안기부·경호실과 달리 경제각료 쪽은 자연스럽게 인물교체가 있었다.
신병현씨가 이례적으로 다시 부총리로 취임했다. 명콤비 김재익 수석을 잃은 강경식 재무장관이 어려운 시절엔 나이가 지긋한 사람 이 경제총수에 낫다고 건의한 것이다. 사공일 경제수석도 신 부총리를 천거했다.
강 장관 자신은 유임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재무장관은 한미은행장으로 실물경제를 익히던 김만제씨가 임명됐다. 전 대통령은 실명제 좌절, 명성 등 대형경제사건의 후유증으로 강 장관을 계속 쓰기엔 적절하지 않았다고 보았는지 그를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상공장관에는 김진호 상공차관을 앉혔다. 그후 김만제-사공일 라인은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김재익 수석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리엔 진의종 민정당 대표가 발탁됐다. 진 대표의 임명은 급부상이라고 할만했다.

<호남출신 총리 등용>
그의 발탁과정에 대한 당시관계자들의 증언.
『83년 이재형 민정당 대표가 자꾸 소리를 내게 하고 당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지 못하자 전 대통령은 그를 갈아야겠다고 작심했지요. 그런데 정계를 은퇴했던 그를 집권당 초대대표로 격식을 갖춰 모셔 왔는데 쫓아내고 신군 쪽 인사를 후임에 앉히면 이 대표가 반발할 가능성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와 과거 야당을 같이했던 진 정책위의장을 후임에 임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7개월 뒤 아웅산 사건이 터져 김상협 총리를 경질했지만 전 대통령은 광주문제가 부담스럽고 해서 호남출신을 계속 임명할 생각이었고 진씨(전북 고창)는 연속 행운을 얻은 셈이지요.』
총리와 비서실장이 갈렸지만 이들은 전임자보다 더 권한이 없었다. 전 대통령은 얼굴마담정도로 여겼다. 이 사건이후 대통령경호는 무척 엄격해졌다. 안기부와 경호실의 자세는 경직돼갔다. 대통령행사장 참석자에 대한 신원파악이 까다로워졌고 행사장은 과거 하루 전부터 하던 것을 2, 3일전부터 통제했다. 5공의 권위적 이미지가 강화됐고 청와대와 민심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호형태도 과시형으로 바뀌었고 근접경호에도 군부대가 직접 투입되면서 대북 경계의 군 작전 개념이 깊숙이 도입되었다. 경호실은 북한이 취할 상식 밖의 경호위해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골몰했다.
요즘 감사원이 추적하고 있는 평화의 댐 건설도 그 연장선상에서 발상 되었다고 할 수 있다. 84년 늦여름 한강수해는 수공 가능성을 주목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한강 인도교수위가 11.03m를 기록하는 대홍수로 인해 소양댐의 수문을 여느냐 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경호실 출신T씨의 회고 .

<84년부터 수공의식>
『당시 시시각각 불어나는 물로부터 댐을 지키자니 서울이 물바다를 이루겠고, 서울을 보호하자니 댐이 넘쳐 물이 하류로 쏟아져 내 려 큰 수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양자택일로 고민했지요. 그런 가운데 북한이 댐을 폭파하면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데 주목한 것이지요. 과거 북한강 일대의 댐은 전쟁시 북한군이 도하하지 못하게 하는 긍정적 장애개념으로 평가됐지요. 그러나 84년 수해 후 수 공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 착안된 겁니다. 그러다가 86년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니까 자연스럽게 물 폭탄 위협을 집중 검토하게 되었지요. 소양강댐이 무너지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84년의 수해경험을 북한이 간파하고 금강산댐을 만드는 것으로 판단한 거지요. 물론 미국이 제공한 정보자료가 핵심 판단 근거가 됐습니다만….』
장 실장이 안기부장으로 옮겨가서 금강산댐 건설을 수공용으로 단정, 확신을 가진 데는 항공사진 정보는 물론 이런 경험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경호실 출신들은 짐작하고 있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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