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송한 「신일본」의 속마음/이석구 동경특파원(특파원 수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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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총리등 「침략」 시인불구 우파각료들 반발거세
『아시아 이웃국가들을 비롯한 전세계 전쟁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해 국경을 초월해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일본의 2차대전 패전 48주년 기념일인 15일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총리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피해국들에 보낸 메시지다.
세상이 바뀐 덕에 사회당 출신으로 중의원 의장이 된 도이 다카코(투정다하자)도 호헌론자로서 오랜만에 할말을 했다. 그는 이날 호소카와총리와 함께 전국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해 『일본인의 과오로 인해 참담한 희생을 강요당했던 아시아 국민들과 우리는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남아있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는 명백하다』고 말해 일본의 반성과 전쟁에 대한 책임을 열설했다.
일본이 전쟁책임을 인정한 것은 어쩌면 뉴스도 되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당연한 사실을 일본총리가 스스로 인정하고 사죄를 하는데 걸린세월은 무려 48년이다. 스즈키 젠코(영목선행) 총리 때까지는 「침략」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피했으며 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 총리는 『국제적으로 침략이라고 심하게 비판을 받고 있다고 사실을 십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직접적인 침략사실 인정을 회피했다. 그밖의 총리들도 침략사실을 인정하는데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소카와 총리의 사과발언은 이같은 역대총리의 자세에 비해 분명 한걸음 나아간 것으로 평가될만 하다. 과거문제는 사과만이 아니라 보상 등 구체적인 조치가 뒤따라야만 진정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한 사회당출신의 야마하나 사다오(산화정부) 정치개혁담당당의 발언도 일본의 대아시아 관계개선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총리의 사과발언에 이어 보상문제까지 거론되자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밀려 은인자중하던 일본 우파세력들이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반발은 내각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아베 모토(안배기웅) 문부성 정무차관은 지난 12일 2차대전을 일본의 책임이라 인정한 호소카와 총리의 발언에 대해 『2차대전이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관이 결여된 것』이라며 발끈했다. 그는 일본에도 잘못은 있으나 세계정세가 일본을 전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면도 있다는 것이다. 학도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던 미카즈키 아키라(삼케월장) 법상은 『전쟁에서 희생된 동료들이 있는데 이들을 침략전쟁에 가담했다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며 호소카와 총리의 발언과 신정권의 움직임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밖에 하타 에이지로(전영차랑) 농수산상,오우치 게이고(대내계오) 후생상 등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민당의 하라다 겐(원전헌) 「함께 야스쿠니(정국) 신사를 참배하는 의원모임」회장은 지난 11일 총리관저를 방문,『2차대전에서 숨진 인간은 모두 개죽음이란 말인가. 유족의 심경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다케무라 마사요시(무등정의) 관방장관에게 침략전쟁 발언취소를 요구했다.
이처럼 일본 우파세력의 반발은 예상 이상으로 강하다. 이들은 특히 호소카와 총리의 과거사문제에 대한 발언이 한국 등 과거 피해 당사국들로부터 새로운 보상요구를 유발할까 두려워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는 전후 일본을 지배해온 자민당 정권의 일관된 생각이기도 하다. 일본의 지배계층은 전전이나 전후나 변한게 없다. 실제로 일본 신정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신생당 등 이른바 신보수의 생각도 비슷한 것이다.
표면에는 호소카와총리 등의 발언,사회당의 배상론 등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배후는 반드시 그렇지가 못하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일본」의 깊은 속흐름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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