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에도 차분한 거리 북한·청와대가 의미 알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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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0면

일주일 뒤 한나라당의 경선에서 제1 야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된다. 그런데 남북 정상회담이란 변수가 불쑥 다가왔다.

우리 정치의 북한 변수는 1975년 4월 베트남의 공산화를 계기로 위력이 급증해 왔다. 당시 중국을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전쟁에서 잃을 것은 군사경계선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라고 하며 조성된 긴장은 이듬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고조됐다.

반(反)유신 투쟁을 주도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마저 영수회담에 응해 “미증유의 난국이라 여야가 다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하자”고 꼬리를 내렸을 정도였다.

이후 1987년 대선(KAL 858기 폭파, 노태우 당선), 1992년 대선(간첩 이선실 사건, 김영삼 당선)을 거쳐 1996년 총선(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 신한국당 원내 1당)까지 북한 변수는 집권 세력에 승리를 안겼다.

그러나 그 이후는 거꾸로였다. 1997년 대선 때는 오익제 국민회의 고문의 월북에도 불구하고 환란의 충격 속에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2000년 총선 사흘 전 DJ 정부의 정상회담 발표는 한나라당의 지지층을 결속시켜 133석의 원내 1당을 만들어 주었다. 2차 북핵 위기가 온 2002년 대선에선 “반미면 어떠냐”는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다.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숱한 허언(虛言)으로 국민의 진을 빼놓은 북측과 우리 집권층 모두가 ‘신뢰의 위기’를 맞은 때문이다. 한국갤럽의 지난해 북한 호감도 조사에선 60% 이상이 “믿지 못할 국가”라고 답했다. 자연스레 감성적 접근 대신 냉소적 시각이 여론의 대세를 형성했다.

최근엔 ‘북한’ 대신 ‘경제 회생’ ‘일자리 창출’의 민생 이슈가 차기 대통령 요건의 상단을 장악했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직후에조차 ‘북한 문제 해결’(19%)은 네 번째 요건에 그쳤을 정도다. 결국 '실용'이 대세인 것이다.

2차 정상회담 발표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담담한 게 요즘의 거리 분위기다. 그 의미를 북한 측과 청와대가 곰곰이 되새겨 보길 바란다.

▶지난 주
8일 남북 정상회담 발표에 정치권 득실 계산 분주=범여권 대선후보들 일제히 환영 논평. 한나라당은 “회담의 시기·장소·절차에서 매우 부적절한 대선용 이벤트”라고 공세
10일 대통합민주신당(85석)·열린우리당(58석) 통합 결의=‘도로 열린우리당’이란 비판 속에 20일 합당키로. 원내 제1당(143석) 지위 회복 

▶이번 주
12일 열린우리당 이해찬 후보 ‘한반도 시대’ 비전 선포식(경기도 파주)=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남북 경제공동체 형성 주장
13∼17일 한나라당 경선후보 합동연설회=경기(13일·안양체육관), 대구·경북(14일·대구체육관), 서울(17일·잠실체육관)
13일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 출판기념회(국회 의원회관)=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간 기념
18일 열린우리당 임시 전당대회(경기도 일산 킨텍스)=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안 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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