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자사기의 풍토(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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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부분의 범죄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확연히 구분되지만 사기범죄에서는 그게 분명치 않다. 양자가 공범적 유대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의도하는 바를 비합법적으로라도 성취하겠다는 욕망이 바로 사기꾼들이 노리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사기를 일컬어 『남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고위층을 빙자하는 사기가 바로 그 전형이다. 사기꾼이 직접 권력층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지만,고위층을 잘 안다는 허위사실을 내세워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가호위,즉 남의 권세를 빌려 상대방의 신뢰를 유도해 내는 수법이다. 이때 피해자 쪽의 사정이 절박하면 할수록 허위로 차용된 위새는 효과가 극대화되게 마련이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사칭하는 것은 모두 호랑이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권력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이 널리 풍토화된 사회에서만 권력을 사칭하는 사기가 통한다. 이승만정권 시절의 「귀하신 몸」 사건이나 3공,5공이래 번번히 발생했던 청와대·기관원 사칭 사기사건들이 모두 부패한 절대권력의 음습한 그늘에서 창궐했던 독버섯들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온갖 사술과 비리를 이용해서라도 남다른 치부와 특혜를 누리겠다는 탐욕에 가려 사기꾼이 쳐놓은 덫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한 해운회사 사장에게 고위층을 통해 은행관리중인 회사경영권을 되찾아주겠다고 속이고 4년동안 1백억원의 돈을 뜯어오던 사기꾼이 검찰에 잡혔다. 뒤를 봐주는 고위층에 전해주는 수고비와 떡값 명목이었다고 한다. 4년동안 한사람에게 사기당하면서도 사기인줄 눈치조차 못챈것은 피해자의 사회경험 미숙에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었던 회사를 다시 찾겠다는 집념이 냉정한 상황판단을 흐리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위층」에 손을 쓰면 합법적으로 안되는 일도 되게 할수 있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사회적 풍토다. 국민의 의식개혁은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 일차적 책임은 물론 「고위층」의 수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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