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전두환-장세동|충성과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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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두환과 장세동. 두 사람의 이름은 곧잘 충성과 의리의 명암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받아들여진다. 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장씨가『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 다』는「심복의 미학」을 털어놓음으로써 양자 관계는 주먹세계의「오야붕」과「꼬붕」의 관계와 같다는 인식이 널리 전파됐다. 장씨는 지금도 전대통령의 5공이 남긴「업」을 뒤집어쓰고 혼자 감방에 갇혀있다.

<전폭적인 신뢰받아>
장씨는 5공 전반기 3년7개월을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대통령을 보좌한 제1의 총신이었다. 5공 통틀어 장씨는 전대통령을 왕처럼 받들어 모시려했다는 평판을 받았다.
전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도는 당대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경호실장 시절 그는 전대통령의 기분상태까지 챙기는「심기 경호」로 명성을 떨쳤다. 장씨 밑에서 경호실에 근무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그의 훈시를 기억할 정도다.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사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가령 부부싸움을 하고 출근한 회사원이 업무에 짜증을 부리면 회사 일에 나쁜 영향을 주게된다. 심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내린 대통령의 잘못된 결단이 국가에 미치는 무형적인 손실은 엄청날 수 있다. 경호실은 대통령의 신변안전을 넘어 대통령이 국정을 편안한 상태에서 기분 좋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대통령이 만기를 현명하게 총람하게끔 심리적 환경을 관리하는 것까지가 경호업무다.』
장씨의 이런 섬세하고 치밀한 업무태도는 늘 전대통령을 안심시켰지만 반대로 최고 통치자로 하여금 여론비판에 둔감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들었다. 그런 만큼 장씨는 실수해도 전대통령에겐 좋게만 받아들여졌고 그의 충성심은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83년 10월9일 북한의 아웅산 사건은 두 사람의 충성과 신뢰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에 속한다. 사건발생 직후 권부 일각에선 장 실장의 거취를 주목했다. 아무리 믿을만 하지만 국가동량이 참변을 당한 상태에서 책임추궁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전대통령은 장 실장의 사표를 반려하고 신임을 보탰다. 우리 경호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운 현지 경호의 악조건을 인정한 것이다. 장 실장에 대한 신임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다.
하나회 출신 민자당의원 Z씨의 회고.
『아웅산 사건의 문제점을 점검한 전대통령은 당시 버마의 배타적이고 특수한 경호 분위기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측면을 감안했지요. 경호실장이 경질되지 않는 바람에 노신영 안기부장도 유임됐어요. 아웅산 문제로 전대통령이 장 실장을 꾸짖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전대통령은 평소 장 실장의 철저한 근무자세를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권력관리의 기본구도에서 장실장이 해오던 역할이 있었거든요. 전대통령은 82년 말 창업 공신 두 허씨(허화평·허삼수 수석)를 내보낸 뒤 군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 대외문제는 노신영 부장에게 1차 맡기고, 경제쪽은 김재익 수석을 핵으로 하여 테크너크랫을 활용했었지요. 그런데 장 실장은 비서실장을 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경호업무뿐 아니라 대통령의 사적 관심사까지 챙기고 정치자금·군부 인사에까지 깊이 개입했었지요.』
장씨의 그 같은 입지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가 경호실장에 임명된 것은 81년7월. 최규하 대통령 때부터 경호실장을 맡았던 정동호 실장(현 무소속 의원) 후임이었다. 그는 67년 말 이래 전대통령을 다섯차례나 최근접에서 보좌했다. 전대통령이 수경사 30대 대장시절 장 실장은 작전장교(대위)였고 육참 총장 수석부관 때는 육본 인사 참모부 장교였다. 9사단 29연대장 때 정보주임(소령)을 했고 1공수 특전여단장 시절엔 대대장(중령)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경호실 차장보 시절 그 밑에서 작전보좌관 및 수경사 30경비단장(대령)을 지냈다.
말하자면 68년부터 77년 말까지 9년간 장씨는 바늘에 실 가듯이 5개의 직책에서 총 7년8개월동안 전대통령을 모셨다.
군대 사회에서 이런 인연은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케이스다. 그만큼 그는 전대통령의 분신으로서 연륜을 쌓았다. 허화평 씨는 전대통령이 보안사령관 때 비서실장을 했지만 측근으로 근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65년 월남서 첫 인연>
이런 두 사람의 인연으로 보면 장 씨가 경호실장이 되고 충복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대통령은 원래 장씨를 군쪽에서 키우려 했다. 보안사에서 12·12와 5공 창업의 프로그램을 짰던 두 허씨는 청와대에서 썼지만 장씨는 실병력을 동원했던 사람들과 함께 군에 남기려 했다.
장 실장은 육사16기에서 단연 선두였다. 동기생 최평욱이 그보다 하나회에 먼저 들어오고 대표화랑 출신이긴 했지만 연대장 때(1사단) 부하 사병의 월북사건으로 옷을 벗을 뻔했다.
그때 전 보안사령관 도움으로 3군 예하 예비군 연대장의 한직에서 재기했지만 최선두 대열로 복귀하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전대통령은 장씨를 경호실장으로 1∼2년쯤 쓰다가 군에 복귀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준장(3공수여단장)으로 청와대로 끌어와 소장(82년 7월)에 진급시켰다. 그는 84년 12월 별을 하나 더 달고 예편(중장)할 때까지 현역으로 있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법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경호실장을 현역군인으로 임명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장 실장 본인도『군에 복귀한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쉽게 말해 전대통령은 참모총장 감으로 생각했던 장 실장을 우선 청와대에 데려온 것이었다. 거기엔 전임 정동호 실장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정 실장이 경호실장이 된 것은 10·26 때문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의 총탄에 숨지고, 이재전 차장은 구속되고, 김복동 차장보는 5군단 부군단장으로 밀려난 뒤 경호실 축소 분위기에서 3단계를 뛰었기 때문이었다.
Z씨의 당시상황에 대한 증언. 『전대통령은 술 좋아하고 다소 덜렁대는 정 실장에게 불만이 많았지요 그는 청와대 부근 실장관사에서 자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했어요. 차지철이 살던 집이 싫었던 거지요. 이 때문에 정 실장은 전대통령의 새벽 불시수행에 늦은 적도 있어요 한번은 새벽에 중구청을 순시할 때 정 실장이 전날 밤 먹은 술이, 덜 깬 것을 알고 전대통령은「다음부는 수행하지 말라」고 호통친 적도 있었지요. 장 실장과 함께 고명승 1군단참모장도 경호실장 물망에 올랐던 것 같아요. 고씨는 전대통령의 경호실 차장보 시절 수경사33경비단장을 지냈고 정동호씨 밑에서 경호실 차장을 했거든요. 전대통령은 고씨의 부인 병환 등을 고려해 일찍 포기했지요.

<자금·인사 깊이 개입>
정 실장은 결국 8사단장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정씨는『나처럼 경호실장을 끝내고 소장으로 진급해 사단장으로 나가는 전통을 세워야 한다. 군대복귀를 생각하면 실장시절 월권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장 실장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는 경호실장에 임명되자 맨 처음 병원에 달려가 신체검사부터 받았다.
『중책을 맡은 나에게 신체적 결함은 없는지 종합검진을 받았지요. 운동하다 갈비뼈가 부러져 수술한 적이 있는데 가끔 그 부위가 뜨끔뜨끔했지요. 의사가 신경이 자라면서 찌르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경을 죽이면 괜찮다고 해 그렇게 했습니다.』
지난 3월 용팔이 사건으로 구속되기 직전 기자와 만난 장 실장의 이야기다.
전대통령이 장 실장을 발탁한데는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그것은 청와대 참모간 힘의 균형문제였다. 81년만 해도 허화평 정무1수석은 비서실 보좌관이란 직책으로 청와대 본관에 근무하는 상징적 2인자였다. 본관에 대통령 결재를 받거나 불려온 사람들은 허 수석에게 얼굴을 내밀고 사전조율·사후평가를 받아 가는 것이 관례였다. 전대통령은 허 수석과 또 다른 신임을 갖고 있던 그를 청와대에 갖다 놓음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시도한 것 같다. 청와대출신 민자당의원 Q씨의 회고.<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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