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여동생 살해” 누명벗은 일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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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경찰 「짜맞추기 수사」 피해/몸서리쳐진 악몽의 22개월/아들 학교선 “전학 가라” 종용/친지·이웃 발길끊고 손가락질/언론에 호소하자 미행감시도
『앞으로는 더 이상 내 아들(12·국교 6년)과 같은 강압수사에 의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5일 서울민사지법으로부터 명예훼손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해 사실상 외아들의 살인·방화누명을 벗긴 권세영씨(40·두부배달·서울 마포구 대흥동)가 털어놓은 22개월간의 사연은 수사기관의 무리한 「짜맞추기식 수사」가 선량한 시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가를 가늠케 한다.
단란했던 권씨 가족에게 불행이 찾아든 것은 집을 보던 막내딸 미경양(당시 9세)이 무참히 살해당한 91년 9월30일.
그러나 더 큰 불행은 『오빠인 권군(당시 국교 4년)이 동생과 말다툼끝에 칼로 찔러 살해한 뒤 방화했다』는 경찰발표가 나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권씨는 당시의 경찰발표에 대해 자신이 하루 18시간 일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사실과 맞는게 없었으며 정황증거였던 ▲권군이 학습능력이 모자라 특수학급에 편성돼 있다는 점 ▲폭력비디오물에 심취했다는 점 등은 모두 경찰이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권군은 화재직후 입원치료중에 연행돼 첫날 13시간,둘쨋날 8시간의 신문끝에 범행을 자백하고 형사미성년자라는 「은전」으로 풀려났지만 권씨 가족의 고난은 계속 되었다.
권군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권군을 위해서라도 전학을 가라』며 종용했고 사설학원에서는 『다른 수강생들이 오려하지 않는다』며 수강을 거부해 그 흔한 학원 한번 보낼 수 없었다.
친지·이웃들도 권군의 결백을 믿으려 하지 않은채 권씨 가족을 손가락질하며 왕래를 중단했고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권씨의 사생활이 복잡하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람에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권씨가 하루 빨리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언론에 호소하고 법적소송을 청구하자 경찰이 미행하며 감시하기 시작했고 경찰의 압력을 받은 가게들은 권씨가 배달한 두부를 받기 거부했다.
권군은 현재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으나 뚱뚱하고 우락부락한 사람만 보면 당시 수사경찰관을 떠올리며 피하고,경찰에서 『본드를 마시고 환각상태에서 동생을 찔렀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던 큰딸(16)도 활달한 성격을 잃고 내성적으로 변해 버렸다. 권씨는 교실에 못들어오게 하면 운동장에서라도 권군 손목을 붙들고 서있겠다고 우겨 전학요구를 견뎌냈고 보름간 불타버린 집앞에서 새우잠을 자며 『더 이상 거주하지 않으니 퇴거하라』는 동사무소 직원들을 설득해 냈다.
『전학을 가고 퇴거를 하면 우리 아이가 범인이라고 시인하는 것 같아 떠날 수 없었다』고 권씨는 말했다.
당시 경찰수사의 문제점을 파헤쳐 큰 힘이 되어준 중앙일보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찾아온 권씨는 앞으로 자신들처럼 억울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힘닿는데까지 돕고 싶다고 말했다.<이상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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