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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세력 당기관(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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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의 측근들 중 당선전부문의 쌍두마차는 김기남·김국태다. 선전공작에 종사해온 고참간부인이 두사람은 지난해 말 당비서국에 나란히 진출했다.
북한 언론계의 원로에 해당하는 김기남은 혁명 유가족이 아니지만 6·25때 가족 여러명이 전사한 이른바「전사자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전사자가족은 혁명 유가족 다음으로 대접받는 「알짜성분」에 해당된다.
김기남은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마치고 모스크바국제대학에 잠시 유학한 뒤 외교계통을 거처 60년대이래 선전계통에서 잔뼈가 굵었다. 출판지도과·신문지도과가 특히 그의 발판이었다. 60년대 초반 소련 고급당학교에 연구원으로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66년 무렵 김정일이 당선전선동부 과장으로 일할 때 김기남은 부부장이었다. 그는 김정일의 영화·가극 제작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깊은 인연을 쌓았다. 문예부문에서 김정일에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는 호칭을 먼저 쓰기 시작한 것도 김기남의 아이디어라는 얘기가 들린다.
김정일이 부부장·부장대리로 승진한 뒤엔 상황이 역전되어 오히려 김기남이 그 밑에서 일하게 됐다. 그럼에도 김기남은 충성을 보여 김정일과 더욱 밀착했다. 이로써 오늘날 측근중의 측근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특히 73년9월 조직사상비서가 된 김정일이 이른바「사설혁명」을 제창했는데 선전선동부 부부장(신문담당) 김기남이 실무를 총괄 지휘했다 (부장 김국태). 그는 그 뒤 『근로자』사를 거쳐 아예 『로동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이른바 「신문혁명」을 주도했다. 신문혁명이란 한마디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유일지도체계에 맞도록 신문을 완전치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김기남은 김정일 지도체제형성과정에서 여론형성에 주도적으로 나서 두터운 신임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86년4월 이후에는 당선전선동부장으로 발탁, 「선전총수」가 됐다.
보도매체에 관한 한 그가 『로동신문』책임주필 현준극, 『민주조선』책임주필 김정숙과 협의는 하지만 지도권을 갖고 있어 힘이 막강하다. 그는 또 당대회보고 등의 집필성원으로 참가할 정도로 정치이론 수준과 필력을 갖춘 인물이기도 하다. 보도매체를 총지휘할 뿐 아니라 김정일 문헌 작성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도 정치적 시련은 있었던 걸로 관측된다. 87년9월에 제1부부장으로 강등, 그해 10월부터 89년7월까지 동정이 끊긴 사실이 있다. 그러나 89년12월 당선전선동부장에 복귀해 김정일의 신임에 「이상기류가 없다」는 게 확인됐다.
김국태 역시 전직「선전통」으로 김기남보다 앞서 당선전선동부장을 거쳤다.
그는 김책(빨찌산 출신으로 내각부수상·전선사령관 역임, 1952년 사망)의 장남으로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이다. 김정일이 어릴 때부터 그에게「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고 김비서가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으로 일할 무렵까지 그랬다고 한다.
김국태는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마치고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한 뒤 56년에 귀국해 당간부부 지도원으로 간부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배경도 좋고 김정일과도 밀착관계를 유지해왔음에도 진급은 늦은 케이스다. 69년의 김창봉·허봉학사건에 연루돼 실각한 그의 동생 김정태는 당시 30대에 민족보위성부상을 맡을 정도였음을 염두에 두면 그의 승진은 더딘 것이었다.
그는 철학을 전공한 당사상이론진의 한사람으로 당대회 보고 등 당문헌 작성에 참여해왔다. 67년부터 당선전선동부장으로 선전부문에서 맹위를 떨치며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주도해 나간 장본인이다.
67년5월 박금철·이효정 사건이후 그는 전임 선전선동부장이던 김도만을 반당분자로 숙청하는 한편 그의 영향하에 있던 선전부문 관계자들을 대폭 물갈이하는데 앞장섰다.
그뿐 아니라 당역사연구실을 김일성혁명역사연구실로 확대개편하고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대대적으로 출판했다. 혁명전통학습도 본격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신임을 두터워졌다.
김국태는 또 선전선동부장시절에 김정일의 후계체제를 출범시킬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가 김정일의 초상화를 김일성초상화와 동등하게 취급하도록 방침을 마련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선전선동부장 말고도 80년대 중반에 과학교육부장·간부부장 같은 요직을 거쳤고 76년과 90년에는 잠시 당 최고교육기관인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교장시절이던 91년7월에 「교수」학위를 받기도 했다. 김기남과 김국태가 당비서에 선출된 뒤 어떤 임무를 맡는지 공식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간의 경력으로 보아 김기남은 선전담당이 틀림없고 김국태는 당조직·당외곽단체 혹은 사상이론부문을 담당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경제담당 비서인 박남기는 김일성의 「경제고문」격인 주요 인물이다. 6·25「피살자가족」인 박남기는 김책공대를 거쳐 레닌그라드공대에 유학까지 한 통계경제전문가다. 북한지도부내의 통계전문가로는 과거에는 윤기복을 최고로 쳤는데 지금은 박남기가 숫자에 가장 밝다고 한다.
그는 국가계획위원장이라는 중책을 거쳐 지금은 경제계획·상업·재정을 담당하는 경제전문비서다.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시절부터 계획분야에서 남다른 실력을 보여 자리를 굳혔다.
특히 김정일의 입김이 작용해 80년대 중반에 급격히 부상했다. 김정일이 경제관련 정책아이디어는 박남기를 거쳐 보고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고 한다. 박남기는 김달현처럼 대외활동은 하지 않으나 북한경제를 움직이는 실세 중 실세인 것이다. <통일부=김국후차장·유영구·오영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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