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출신 작가 공순자씨|『질투』로 첫 스토리 창안자 등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순자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을 방송작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크레딧 자막에 「극본 이순자」라고 올라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방송가에선 알아주는 인물이다.
지난해 최진실·최수종이 정상의 연기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토록했고, 주제가를 「금주의 인기가요」1위로 밀어 올렸던 MBC-TV7 미니시리즈 『질투』는 그녀가 없었다면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질투』의 타이틀 자막에서 그녀는 「원안 이순자」로 나왔다.
이 프로 때문에 그녀는 국내최초의 스토리 창안자(story creator)로 기록되었다. 이씨의 꿈도 「스토리 창안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씨가 이번에는 『파일럿』이라는 16부작 미니시리즈를 「썼다」. 그러나 오는 9월 MBC-TV를 통해 방송 예정으로 현재 해외촬영에 바쁜 이 드라마에서도 그녀는 「극본 이순자」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플롯을 짜고 장면을 구성하는 일을 도맡았지만 최종 대사집필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이씨가 대사작업을 마무리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다. 재일교포 3세인 그녀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22년을 그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대사를 직접 쓰기엔 능력이 못 미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53년생인 그녀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0년 전이었다. 동경 고마자와(구택)대학중문과졸업후부모의 권유로 이화여대 법학과에 유학하게된 그녀는 4학년말 유학생 선배와 결혼을 감행했다가 들통나 학교를 중퇴했다.
평범한 주부로 7년을 살았던 그녀가 직업을 구하게 된 것은 83년 KAL 007기 격추사건 때문. 남편이 KAL 비행사인지라 유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일자리를 얻은 게 KBS 국제방송 아나운서였다.
이후 구성작가도 겸하게 되고 우연찮게 MBC-TV 『조선왕조 5백년』「임진왜란」편에서 일본측과의 업무협의 등을 도와준 게 계기가 돼 그녀는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을 갖게 됐다. 이어 해외로케 주선·현장통역등 방송 주변 일을 하다 재능을 인정받아 드라마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파일럿』은 남편 직업인 비행사의 세계를 드라마로 옮겨보려는 오랜 꿈의 결실이다.
『한국의 드라마는 한 회가 끝날 때 다음 회를 기대하도록 하는 긴장감이 부족한 것같다』는 그녀는 극의 종결부를 먼저 정하고 나머지를 구상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녀는 일할 때도, 말 할 때도 20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인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영화·만화를 좋아하는 신세대(?)인 탓인지 대사보다 감각으로 처리하는 데 능하다는 평. 『질투』에서부터 콤비로 일해온 이승렬PD는 『아이디어가 많고 구성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그녀는 『우리 방송계에서도 공동 대본작업이 정착돼 좀 더 신선하고 폭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TV용 SF·서스펜스물을 써보고 싶다고.

<곽한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