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시비 세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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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분단과 독재에 앗긴 순수와 자유를 아프게 노래하다 간 시인 박봉우씨(1934∼90)의 시비가 세워진다. 서정주·구상·조병화·고은·신경림·황명·문덕수·백낙청씨 등 문인 97명과 전남대·광주고 등 박시인 출신학교동창회는 『분단조국의 뼈아픔을 달래고 통일염원을 영원히 기념한다』는 취지로 박봉우 시비 건립추진 발기인회를 최근 결성, 모금 등 기금조성에 들어갔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시비에 새겨질 박시인의 56년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휴전선」전반부다.
박시인의 시와 삶은 분단으로 왜곡된 사회와 역사를 쓰다듬는 일에 바쳐졌다. 사회과학에서 규명한 「분단모순」을 이미 휴전 직후부터 응시하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시는 과학이나 구호가 아니라 이 모순에 상처 입은 순수 어루만지기라는 정서로 나가 시적 울림을 더 크게 했다.
굵은 남도정서로 사회와 삶의 아픔을 읊으며 깨어난 시인으로서 서울의 삶을 버텨냈던 박시인은 75년 낙향해버렸다.
『오직 자유만을 그리워했다/꽃을 꺾으며/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난군 앞에/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나는 떠나련다/서울을 떠나련다』라는 시「서울 하야식」을 남기고 독재의 겨울공화국 수도를 빠져나갔다.
전주에서 자신은 시립도서관 직원 등으로, 아내는 리어카행상 등으로 어렵게 삶을 꾸려가다 「쌀이 떨어졌네」라는 시를 끝으로 박시인은 90년 3월 타계했다. 시집으로는 『휴전선』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등 7권을 남겼다. 휴전선을 빌미로 한 독재에 앗긴 순수를 외롭게 보듬다간 박시인이 이제 통일염원의 시비로 돌아오게 됐다.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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