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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병원산업 키워낸 싱가포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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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근 아시아 13개국 53명의 병원 책임자와 함께 싱가포르 경영대학의 병원경영교육프로그램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싱가포르 경영대학은 교육시장 개방정책에 따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이 설립한 학교인데 한 다국적 회사로부터 미화 22만달러를 받고 이번 교육을 위탁받았다고 한다. 대학도 경영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싱가포르에서는 매년 2백명의 의사만 배출시키고 부족한 의사는 외국에서 수입한다. 싱가포르에서 의과대학에 불합격하면 옥스퍼드의대에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의과대학 입학생의 수준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의사협회에서는 수입하는 의사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 선진국의 75개 의과대학 출신에 한해 의사면허를 인정하고 있다.

얼마 전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영국 방문 중 부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영국 병원에서 싱가포르로 긴급 공수해간 일이 있었다. 사회주의화된 영국 의료 현실과 함께 자국 의료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싱가포르도 우리와 같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에서 관리들은 제조업이 중국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제조업은 더 이상 성장엔진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고 서비스분야를 제2의 성장엔진으로 추진, 보건의료.교육 등 7개 서비스 분야를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집중 육성했다. 그 결과가 싱가포르 교육의 세계화이며, 병원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싱가포르는 2012년 1백만명의 외국인 환자를 유치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성공하면 국내총생산(GDP) 1% 성장, 38억달러 수입, 8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외국인 진료는 주로 민간병원이 담당하고 있고 공공병원은 일반 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공공병원과 민간병원의 병상 수는 80대 20으로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이며, 민간병원들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영리법인으로 비영리단체로서 운영할 때 발생하는 관리부실.낭비.비효율을 철저히 줄였다. 특히 의료만으로는 세계적인 허브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각 서비스 분야가 상호 보완하는데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소유한 병원 직원이 외국환자 가족에게 관광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싱가포르는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의료를 건강산업(Health Industry)으로 선언한 뒤부터 철저하게 공공부문인 국공립병원과 민간병원의 차별화를 실시했다. 국공립병원은 예산의 40~50%를 정부보조를 받아 운영하는데 기본 병실에는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도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돌아간다. 그러나 민간병원의 VIP병실은 특급호텔보다 더 호화롭다. 이러한 차별을 정부나 국민이 받아들이는 것은 국공립병원의 기본 병실은 80%를 정부가 보조하고 있기 때문이며, 돈을 더 내면 상급병실로 갈 수 있다는 환자의 선택권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에 11개 병원체인을 두고 있는 싱가포르 제일의 민간병원그룹인 글렌이글스병원의 홍보영화에는 부분 간이식, PET에 대한 소개, 맞춤방사선 치료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첨단수술이나 장비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시술됐고 상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장비 이용료 등은 싱가포르가 네배 정도 비싸다. 달리 보면 우리나라 국민은 이런 첨단 장비와 시술을 정부의 지원 없이 성장한 민간병원 덕분에 적은 비용을 내고 이용하는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두바이 정부가 의과대학과 병원을 포함한 헬스케어시티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래플스병원에 제의했다. 우리에게는 왜 이런 제의가 오지 않을까. 의료기술.제약.바이오테크 산업에 강하면서도 의료산업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고, 그에 걸맞지 않게 최상의 서비스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의약분업 등으로 의료에 대한 국민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는 동안 싱가포르는 의료를 시혜 차원이 아닌 건강산업 차원에서 육성 발전시킨 결과가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이철 연세의료원 기획조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