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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바꾸지"→ "안되는데요"→ 재떨이 날아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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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2년 8월 어느 아침, 밤새 택시 운전하고 곤하게 자고 있는 이용재(44)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건축가 김원(61.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씨다.

"택시를 모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며 절필한 건축평론가 이씨에게 김씨는 글 한 편을 부탁한다. 1989년에 함께 '김원 건축 작품집'을 만들었던 인연은 질겼다. 단잠이 깬 그날을 배경으로 한 '제발 잠 좀 자자'는 김원씨가 설계한 서울 정동 러시아대사관에 얽힌 한.러 관계를 풀어놨다. '제발…'을 필두로 택시운전사 이씨가 온라인에 올린 조각글 서른 두 편을 모은 '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이용재가 보는 김원 건축 이야기'('책으로 만나는 세상'펴냄)의 시작이었다.

'좋은 물…'은 한 건축가가 평생 지은 집에 대한 견문기다. 하지만 지은이의 시선은 건물에서 멈추지 않는다. 책에 자주 언급되는 건축가와 권력자.관료 간 갈등과 대립은 한국 현대사를 다시 보게 만든다.

"1987년 10월 서둘러 설계 계약을 한다. 기본설계 납품은 88년 2월까지다. 왜 이리 촉박한가? 정권 말기라 그렇다. 81년에 체육관에서 당선된 '땡전(전두환 정권)'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통일연수원)

"건설본부장은 전직 육군준장. 박통(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본부장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이봐 김소장. 내가 말이야. 영국 버밍햄 전시장을 보고 평면을 하나 그려왔는데 말야. 좀 바꾸지.''안 되는데요. 본부장님은 2년짜리 월급쟁이 아닙니까. 건축주는 국민입니다.' 재떨이가 날아온다."(코엑스)

역대 대형 건축물 공사 이면에는 비정상적으로 권력을 잡은 이들의 전시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원씨는 그 와중에 환경주의자로, 문화재 보존운동가로 헤쳐왔다. 지은이는 글을 통해 한국 젊은이들에게 '진실되게 살아도 손해보지 않는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물론 권력과의 갈등만을 담은 건 아니다.

"8각형 기도방, 묵상의 공간이다. 침묵의 공간이다. 수녀들은 이 8각형 안에서 자기를 비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권이 바뀌거나 말거나."(청파동 순교복자수녀원)

김원씨가 지난 30여년 찾아온 것은 '정신'이었다고 이씨는 풀이한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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