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영화 '실미도'의 실제 모델 김방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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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실미도에서 훈련받은 북파(北派) 부대원 중 30% 정도만 전과자였어요. 나머지는 일반 민간인이었죠. 모병 과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 돈이나 장래에 대한 보장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영화에서처럼 사형수나 무기수로만 부대를 결성해 북한에 보낸다면 과연 그들이 다시 돌아오려 했을까요?"

1968년 4월 '김일성의 목을 따오라'는 특명 하에 결성됐던 684 부대를 다룬 영화 '실미도'가 놀라운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한국 영화로선 사상 최단기간인 보름 만에 4백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지금까진 '친구'가 23일 만에 4백만명을 돌파한 게 기록이었다.

영화에서 부대원들이 교관들을 죽이고 탈출하기 전, 출장을 가는 바람에 혼자 살아남는 '조중사(허준호 분)'는 실제로 684 부대의 훈련 교관이었던 김방일(59)씨를 모델로 했다. 12일 방송되는 CBS '새롭게 하소서'(라디오 오후 1시5분, 케이블TV 밤 12시)에 출연하고자 지난 8일 목동 녹화 세트를 찾은 그는 "영화 '실미도'가 무장 공비나 괴한으로 매도돼 온 684 부대의 실체를 널리 알려준 것은 고마운 일"이라며 "그러나 극적 효과를 내려다보니 영화 내용은 과장된 점이 많다"고 했다.

"영화와 달리 상부로부터의 사살 명령 같은 건 없었어요. 훈련병들이 나날이 보급 여건이 열악해지는 걸 견디다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려 탈출했던 것이죠. 저는 교육대장(김순웅 상사)과 함께 인천 보급부대로 출장을 갔다가 71년 8월 22일 실미도로 돌아가려는데 약혼녀(현재 부인)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배가 출발한 뒤 김 상사께 그 얘기를 했더니 '너는 하루 더 있다 와'하시더군요. 그 길로 물에 뛰어들어 인천으로 되돌아간 것이 생사의 갈림길이었습니다."

23일 아침 무장공비가 인천항에 출현했다는 뉴스를 듣고 이상한 느낌에 실미도로 돌아간 김씨의 눈엔 교관들의 처참한 시신들이 들어왔다.

"23명의 교관 중에 17명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여섯명은 총상을 입고도 살아 있더군요. 하지만 이 가운데 세명은 요즘도 정신이 나가 대화도 제대로 못할 만큼 사건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실미도 사건을 소재로 한 모 소설에선 교관 뿐 아니라 훈련병 중에도 생존자가 있다는 주장을 폈으나 김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원래 청와대를 치러왔던 북한의 124군 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부대를 구성했지만 혹독한 훈련 과정에서 일곱명이 죽고, 탈출 과정에서 한명이 죽어 23명만 탈출했습니다. 노량진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을 기도한 탈출자들 중 네명이 살아남았지만 나중에 군사재판에서 모두 처형됐어요."

사건 이후 일반 부대로 배속돼 19년간 군 생활을 더 한 뒤 90년 7월에 공군 준위로 예편한 김씨는 현재 고향인 청주에서 냉난방 설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아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간 동료와 훈련병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는 그는 99년 모 방송사에서 실미도 사건을 일부 보도한 이후 684 부대를 거쳐간 생존자들과 연락이 닿아 '실미전우회'를 만들었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끼리 1천만원을 모아놓았어요. 실미도나 노량진 인근에 위령비라도 세우려구요."

김씨는 영화 '실미도'로 가슴 속 응어리가 절반 쯤은 풀어진 듯 하다면서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죽은 자들을 위로하면서 풀려고 한다"고 말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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