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왜 엉뚱한 데 주먹질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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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벌써 21일째다. 우리 젊은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인질로 붙잡힌 기간 말이다. TV에서 가족들이 눈물로 하소연하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볼 때마다 가슴 저린다.

 “제발 아프가니스탄 비자 좀 내주세요. 절 그 나라에 보내주세요”라고 울부짖다 기진한 늙은 어머니. 맞다. 내가 납치됐으면 우리 어머니도 저럴 것이다. “당신 너무 힘들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오열하는 젊은 남편. 그렇다. 내 아내가 납치됐으면 나도 그런 맘일 것이다. 그때마다 간절하게 기원한다. “저 어머니, 저 남편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 돌아오라.”

 그러다 한순간 울컥 하는 심정이 된다. 아무런 저항 능력도 없는 배형규 목사에게 10여 발의 총탄 세례를 퍼붓고, 착한 청년 심성민씨를 멋대로 처형하고, 몸이 아파 신음하는 여자들을 끌고 다니는 탈레반에 대해서다.

 그게 종교라고? 알라신과 선지자 마호메트도 이런 반인간적인 행태에 분노할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을 납치해 제국주의에 저항한다고?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종교를 빙자한 잔혹일 뿐이다.

 하지만 피랍 사태가 발생한 7월 19일 이후 국내에서는 일종의 주객전도(主客顚倒) 현상이 적지 않았다.

 인터넷 등에 넘쳐났던 댓글을 보자. 한국 교회가 해외 봉사를 과시 수단으로 삼았다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래도 순수한 마음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사람들까지 욕하고 매도할 순 없다.

 분명히 해두자. 탈레반은 기독교인만 인질로 잡는 게 아니다. 그들 스스로 밝혔듯 무슬림이 아닌 외국인은 누구나 납치 대상이다. 불교든 무신론자든 가리지 않는다. 봉사냐 선교냐도 큰 상관없다. 기자도 잡고, 건설공사장 기술자도 잡는다.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인·이탈리아인·일본인도 다 대상이다. 기회만 있으면 무조건 납치한다.

 따라서 “가지 말았어야 하고, 가서도 훨씬 더 조심했어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그것은 안타까움이다.

 하지만 세계가 탈레반의 만행에 분개하는데 한국에선 오히려 피해자인 자기 국민을 손가락질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일부에선 “왜 다산·동의부대를 거기에 파병했느냐”며 파병이 납치 원인인 것처럼 몰아가려고 했다. 웃기는 소리다. 탈레반은 파병 국가 국민만 납치하는 게 아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미국 책임론이다. 미국이 나서서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탈레반 죄수들을 풀어 주라고 압력을 가하라는 것이다.

 아마추어 식 발상에 불과하다. 이라크에선 이미 수천 명의 미군이 죽었다. 그런 미국이 테러 집단인 탈레반과의 타협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한국 정부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해선 탈레반과의 막후 거래를 부탁하고, 미국에는 모른 척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실질적으로 일을 풀어 나가는 외교력 말이다. 제대로 된 외교였다면 탈레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현지 부족 족장들도 접촉했을 것이다. 돈이든 인맥이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

 우리 정부가 외교 역량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하고 바란다.

 하지만 불안감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피랍 이틀 만에 CNN을 불러다 기자회견을 한 게 잘한 일인지, 그보다는 조용한 ‘침묵의 거래’(silent deal)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자꾸 의문이 든다. 한국 정부가 엉뚱한 집단에 돈을 줬다고 불평한 탈레반의 주장도 사실 여부가 궁금하다. 정부가 나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단 말인가.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에 간 대통령 특사는 도대체 뭘 했는지.

 상황은 아직 진행 중이다. 희망을 놓지 말자.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그리고 확실히 해두자. 나쁜 건 탈레반이다. 또 문제 해결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해야 한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