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 일을 감히 시대적인 사건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그 땅을 왜 유독 한국 젊은이들이 찾아갔는가. 사실 아랍권은 한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역이다. 관계성을 따진다면 유럽이 오히려 그들과 가깝다. 한때 그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의 젊은이들이 그 나라에 가서 이런 식의 대규모 봉사를 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아프간이고, 이라크다. 그 나라에 한국 젊은이들이 가서 계속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것이 단지 종교적 열정 때문이라면 한국에 왜 이러한 종교적 열정이 불게 되었는가. 그들을 그곳으로 부른 힘은 무엇인가.
유럽은 지금 무슬림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한때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랍권 이민을 허락했던 국가들이 이제는 그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테러와 문화적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히잡을 쓸 수 있게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사회가 양분돼 있다. 그들을 유럽 문화에 통합시키는 것이 옳으냐, 그들의 문화를 별도로 인정해 주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유럽이 점차 자기 것을 잃어 간다는 자성의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 만큼 우월을 따질 수 없다는 상대주의류의 탈계몽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휩쓸고 있다. 인류가 보편적이라고 믿어 왔던 자유·인권·민주, 심지어 관용과 생명존중이라는 가치들조차 유럽인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줄고 있는 유럽은 결국 무슬림에게 그 땅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이런 유럽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그것이 종교의 이름이든, 봉사의 이름이든 무슬림 세계로 나가고 있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유럽은 쇠퇴하고 그 자리를 한국이 대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사적으로 본다면 유럽 문명이 발전시킨 보편적 가치를 이제는 한국이 세계로 전파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닐까. 단지 무슬림 국가만이 아니다. 우간다·뉴기니·캄보디아·우즈베키스탄 세계 구석구석에 한국의 선교사들이 박혀 있다. 선교사 파견 숫자로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다. 후진국을 위해 우리 정부가 쓰는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꼴찌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 대신 민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지배와 착취,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베풀고 고쳐 주기 위해서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 한국의 힘이며 미래다.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경제나 정치에만 있지 않다. 나라가 번영할 때는 반드시 정신적 힘이 뒷받침됐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은 그에 앞서 노예해방 등 정신적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상인들은 세계에서 최고의 정직성을 인정받았다. 20세기 미국의 번영은 19세기 말 미국의 각성운동에 힘입었다. 알렌·언더우드·세브란스등 미국 선교사와 그 후원자들이 바로 그때 조선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 힘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성장통(成長痛)이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