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비행으로 KAL기 사고 규명/ICAO,인천서 나흘간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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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회수 블랙박스 싣고 항로이탈 원인검증/결론따라 외국인 유족배상금 지급 영향
83년 9월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된 비극의 KAL007기는 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 깊숙이 들어갔을까.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팀이 1일부터 대한항공 인천운항 훈련원에서 러시아측으로부터 넘겨받은 블랙박스 등 그동안 모의실험비행을 실시하고 있어 올해로 사고 10년째를 맞아 KAL기의 사고원인 규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4일까지 계속될 이번 실험비행은 한국·러시아·미국·일본 등 관련 4개국의 항공전문가 20여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달말 제139차 ICAO 이사회에 최종 결론을 담은 보고서 제출을 앞두고 피해국인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모의실험비행 첫날인 1일은 사고기종인 보잉 747­200기의 동일한 모의비행기(시뮬레이터)에 KAL기의 비행경로기록장치(DFDR) 입력과 절차에 따른 상호협의 등 준비절차를 마쳤고 2일부터 본격적인 모의 비행에 들어갔다.
모의비행은 시뮬레이터에 피격 KAL기에서 회수한 블랙박스의 DFDR(Digital Flight Data Recorder·비행경로기록장치)에 기억돼 있는대로 입력,항로이탈 여부를 확인해 최종결론의 증거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다.
DFDR에는 KAL기가 「운명의 그날」 앵커리지를 이륙한후 피격될때까지의 5시간26분간 비행시간동안 비행고도와 속도·방향·엔진상태·풍속·풍향 등 약 50가지의 비행자료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이번 모의실험비행에 사용하는 시뮬레이터는 조종사 훈련용으로 대한항공이 84년 캐나다에서 6백80만달러를 주고 들여온 것으로 항공기 조종칸을 꼭같이 복사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모든 성능이나 계기작동,화면을 통한 입체감,진동 등이 실제경험과 똑같아 시뮬레이션 훈련만 마치고도 항공기를 조종할수 있을 정도다.
예컨대 시뮬레이션을 타고 뉴욕공항에 착륙할경우 앞과 옆 컴퓨터 화면에는 맨해턴의 빌딩과 허드슨강이 실감있게 영상으로 펼쳐지고 활주로가 눈앞에 진짜처럼 나타날뿐 아니라 안개·천둥·폭풍 등 악천후의 기상조건도 사전에 입력한대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KAL기의 DFDR를 시뮬레이터에 입력할 경우 사고발생까지의 행로행적을 재연할 수 있게 된다.
그란 ICAO조사단의 이번 모의실험비행은 이미 ICAO가 자체적으로 조사·분석한 것을 검증하는 단계일뿐 사고원인 규명에는 접근하지 못할 것으로 보는 항공전문가들도 있다. 사건수사시 통과 의례 정도로 치르는 「현장검증」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ICAO가 내린 추정결론은 조종사가 자동관성항법장침(INS)를 풀고 나침반 항법으로 KAL기를 조종했거나 출발지점에서부터 좌표를 INS에 잘못 입력했다는 두가지로 압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번 모의비행결과 이중 하나가 최종결과로 채택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이 어느것이든 이는 조종사의 실수로 귀착되기 때문에 대한항공측으로서는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우선 조종사의 조종실수로 정해진 항로를 벗어나 소련영공을 침범함으로써 엄청난 사고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대한항공의 안전운항 이미지가 크게 손상될 것으로 보인다.
또 승객 2백69명중 이미 10만달러에 합의한 한국인 승객 1백5명 등 1백75명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자국의 법원에 각각 계류중인 미국·일본·캐나다 등 외국인 94명에 대한 배상금 지급문제도 대한항공에 불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정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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