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씨의 행로… 그 시작과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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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치도박」 좌절… 깨진 「용광로 신화」/대중정치인 YS에 돈믿고 무모한 도전/한때 대권야심… 노에 이용만 당하고 몰락
「기업인 박태준」은 「정치인 박태준」으로 변신한후 불과 몇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철저히 몰락했다. 그는 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로 허허벌판에 포철신화를 창조했던 유능한 기업인이었다. 그러나 기업세계와 정치판을 동일시하고,특히 김영삼이라는 철저한 대중정치인에게 순전히 돈만을 무기로 대항한 것은 그의 30년 명성을 하루아침에 허물어 뜨리고 말았다. 의회주의 정치인에 맞서 금권정치를 시도하다가 패해 세무조사를 당한것을 놓고 정치보복이라는 일부 시각이 있음에도 박씨측은 별로 동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박씨의 몰락은 지난 89년말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민정당대표에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 5공시절 전두환대통령에 차출되어 11대 전국구의원을 지냈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박씨의 정치경력은 기업을 보호하려는 방어적 수준이었다. 때문에 박씨의 정치겸업은 민정당대표 취임으로부터 봐야한다. 그러나 그는 노 대통령이 주도한 3당 합당과정을 전혀 몰랐다. 그의 정치역정이 겉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선배」로 호칭하며 깎듯이 대접하는 노태우대통령의 진짜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노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로 생각했다. 노 대통령이 박씨를 「김영삼 견제카드」 정도로 생각한것을 확인한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어쨌든 박씨는 상당기간 민자당 최고위원으로 최대계파인 민정계의 수장역할을 하면서 대권을 꿈꾸고 준비해 나갔다.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여당 정치인의 「힘」은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으며,추종세력들의 치겨세우는 언사가 얼마나 덧없는지를 그는 잘 알지 못했다. 그의 자금력이 워낙 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혜택을 입지않은 민자당의원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앞뒤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의원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 속에서 박씨는 김영삼대통령(당시 대표최고위원)과의 한판 승부를 생각했다. 지난해 3·24총선을 앞두고 박씨는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뿌렸다. 김영삼 직계에게도 5천만∼1억원을 뿌릴 정도였다.
선거자금을 지원받은 「은혜」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고 보고 그는 대통령 후보경선을 위해 세게 「베팅」한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의 정치스타일을 「패도정치」로 몰아 붙이며 사사건건 충돌하던 그는 후보경선을 앞두고 대권도전 의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금줄을 포항제철에 대는것은 물론 두뇌공급까지 포철로부터 받았다. 당시 포항공대안에는 박씨를 위한 「대권연구팀」이 만들어져 활발한 작업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이때까지 이중플레이로 일관하던 노태우진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진영의 반발과 노에 대한 협박은 거세어갔다. 노 당시 대통령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박씨가 선을 넘고 있다는 경고신호를 보냈다. 이때 박씨는 주의사람들에게 『노심은 나에게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돌아가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그의 측근들에 따르면 이러한 연속적인 오판에는 기업인으로서 실패를 몰랐던 전력과 함께 중요한 계기때마다 포철맨들이 「박 교수」라고 부르는 역술가(박 도사)의 판단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이상연 당시 안기부장이 총대를 메고 박씨를 만나 그의 약점에 관한 자료까지 들이대며 「꿈꾸지 말것」을 설득겸 협박해 주저앉혔다.
그러나 박씨는 대신 이종찬의원을 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둘이서 함께 「안되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의원이 막바지에 경선거부를 선언한뒤 그의 행보는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18일 노 대통령이 박씨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민자당 탈당을 선언하자 그의 울분이 폭발했다. 김영삼후보를 만나 내각제를 대선공약으로 내걸라고 요구하며 최후의 담판을 시도했으나 김 후보는 코웃음쳤다. 10월10일 광양에서의 소득없는 만남을 끝으로 그는 김 후보와 결별했다. 민자당을 탈당한 것이다.
대선기간중 그는 민자당과 국민당 양쪽을 두고 저울질했다. 그는 정주영씨에게 등뒤에서 협조를 다짐하고 채문식 전 의원 등을 합류시켰다. 해외에 나돌던 부정확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의 오판을 또 다시 부추겼다. 결국 대신 전날의 「편지소동」은 그의 정치행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됐다. 민자당측이 정주영씨의 박씨 영입설을 상쇄하려고 박씨가 김영삼후보에게 보낸 「우호적 서신」을 공개한 것을 도리어 성토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로써 그의 꿈은 한낱 악몽으로 끝나고 만것이다.<노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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