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초 운동장 지킴이' 임현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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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엄마들의 힘'이 '베테랑 운동권'을 이겼다. 서울 중구 정동 덕수초등학교 운동장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락됐다. 학부모의 시위가 잇따르자 이 학교 운동장에 민주화기념관을 건립하려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3일 이를 철회했다. 문제가 불거진 지 한 달 만이다. 베테랑 민주화 운동가들에 맞선 엄마들의 승리였다. '운동장 지키기' 덕수초 대책위의 공동회장 중 한 명인 이 학교 명예교사회장 임현애(39.사진)씨에게서 5일 그간의 경과를 들었다. 임씨는 사업하는 남편을 둔 전업주부로 국문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방과후 책읽기 지도에 나서기도 한다. 명예교사회는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을 돕는 재학생 학부모 모임이다. 임씨의 아들은 이 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업회가 기존 방침을 철회했다.

"결정에 너무나 감사한다. 그분들이 '약자'인 학생.학부모의 처지를 결국 받아들였다."

-기념관 건립 방침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지난달 초 학교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바닥이 고르지 않고 학생들이 다치는 사고가 생겨 (토지 소유주인) 행정자치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방학 중 보수공사를 하려던 때였다. 운동장 고치라고 돈까지 받았는데 그 땅을 내놓으라니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덕수초등학교 운동장 갈등을 보도한 본지 7월 31일자 10면. 사진은 덕수초 학생.학부모가 서울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에서 "운동장을 빼앗지 말아 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상대가 시위 베테랑인데 어떻게 시위까지 할 생각을 했나.

"처음에는 학부모.동문 중심으로 서명을 받고 탄원서 정도나 낼 생각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니까 약자의 입장을 알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난달 24일 사업회 측과 첫 간담회를 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 자리에서 사업회 측 사람이 '그럴거면(운동장을 못 비워주겠다면) 이 땅을 사라'고 말했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방 빼라'는 식이었다. 참기 힘들었다. 시위로 '베테랑 운동권'을 이길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겁도 났다."

-시위가 쉽지 않았을 텐데.

"경찰에 집회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어머니들 중엔 소위 '386 학부모'도 많지만 시위는 모두 초보다. '프로 운동권'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우리의 힘은 아이들이었다. 오직 아이들을 위한다는 생각만 했다. 천막사를 하는 학부모는 플래카드를 무료로 만들어 줬다.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엄마들은 기념사업회를 반박할 자료를 뒤졌다. 운동장이 덕수궁 의효전의 터라는 사실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됐다."

-기념사업회 측에 하고 싶은 말은.

"일산에서 서명을 하러 일부러 찾아 온 가족도 있었다. 덕수초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자신도 초등학생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 너무 화가 나 왔다는 것이다. 민주시민 교육의 활성화라는 기념관 설립 취지는 이해한다. 사업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역설적으로 '밀어붙이기식 행정'은 막아야 한다는 '민주시민 교육'을 시켜 준 셈이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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