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난파 위기 대전 시티즌 맡은 김호 감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1호 17면

대전=연합뉴스

“돌아가는 저 길에 외로운 저 소나무. 수많은 세월 속을 말없이 살아온 너.”

63세 백발 투혼이 K리그 달군다

김정호가 부른 ‘외길’은 김호(63) 대전 시티즌 감독의 애창곡이다. 굵은 목소리에 얹힌 가사와 음률에는 그가 걸어온 고뇌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통영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흔치 않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옆에 끼고, 영화를 보기 위해 통통배를 타고 부산을 다녀오던 낭만 소년은 왜 외로운 길을 힘겹게 돌아와야 했을까? 두룡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4년 대만과의 마닐라 아시안게임 결승전 패배에 화가 나 축구를 하기로 결심, 최고의 유망주로 성장했던 그는 무슨 까닭으로 ‘성공의 보증수표’였던 유명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쳤을까? 동래고 스승인 고 안종수 감독을 좇아 제일모직을 선택한 의리가 그의 삶에 짊어지울 힘겨움을 청소년 김호는 알고 있었을까?

당당한 고졸…자타 공인 축구 박사

해외 원정에 나섰던 청소년대표 시절. 공항 활주로 위에 공이 흩어지자 감독은 대학을 다니지 않는 선수들에게만 공을 줍게 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공을 찾아다니며 어렴풋이 자신에게 닥칠 험난한 인생을 예견했다.

1969년 누가 뭐래도 최우수선수상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문대를 나온 동료가 상을 받자 분개한 나머지 자신에게 수여된 우수상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시상식장을 뛰쳐나왔다. 암묵적인 왕따도 수차례.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고졸이라는 멍에를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감히’ 고졸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겠다고는 생각도 못하던 그 시절. 김호는 ‘숙적’ 일본의 스기야마를 잡기 위해 밤새 살이 까질 때까지 태클훈련에 몰입했고 1970년 포르투갈 벤피카의 내한 경기에서 에우제비오가 텅 빈 골문을 향해 차올린 슛을 손으로 막았던 승부욕으로 학연의 고리가 얼기설기 얽힌 한국 축구사에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라는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그는 조급하지 않은 ‘기다림의 미학’으로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우뚝 섰다. 구타가 횡행하던 그 시절 인자한 아버지 같은 리더십으로 제자들을 품에 안았고, 부조리한 현실에는 강하게 저항하며 숱한 징계를 표창장처럼 남겼다.

한국 축구의 젖줄 ‘김호의 아이들’

그의 이름 앞에 ‘명장’의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수많은 우승 트로피(한일은행 9차례 우승ㆍ수원 삼성 13차례 우승 등)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지도철학에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짊어질 떡잎들을 키워낸 ‘국가대표 제조기’의 헌신이 녹아 있다. 혈혈단신 독일 등 유럽을 돌며 어린 선수 육성법을 체득한 그는 1975년 모교인 동래고 지휘봉을 잡아 황석근과 정용환 등을 국가대표로 키워냈다. ‘김호의 아이들’의 원조다.

1981년 12월 한일은행 감독에 취임한 후 창단 11년간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한 팀을 재건하기 위해 그는 하루에 두 갑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는 우신고에 다니다 졸업 직전 부정선수 문제로 팀이 해체 위기를 겪는 바람에 대학에 못 간 최강희(전북 현대 감독)를 받아들였고, 고려대에서 무릎 수술을 받아 2년간 공백기를 겪은 이상용(국제축구심판ㆍ영도중 체육교사)을 영입하기 위해 각서까지 쓰며 감독직을 내걸었다. 부산 동아고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왕선재까지 합류시켰다.

이들을 앞세워 1983년 창단 13년 만에 첫 우승을 이룬 김 감독은 윤덕여(경남 코치)ㆍ윤성효(숭실대 감독)ㆍ이학종(수원공고 감독ㆍ박지성의 스승) 등을 단련시켜 우승 가도를 달렸다. 1992년 7월 그가 수많은 대학 출신 지도자들을 제치고 한국 축구사상 최초로 ‘전임 국가대표 감독’에 뽑힐 수 있던 이유다. 수원 감독 시절 조련한 이운재ㆍ조재진ㆍ김두현ㆍ손대호 등은 현재 대표팀에서 맹활약 중이며, 캐나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2골을 뽑아낸 신영록(수원) 등 어림잡아 50여 명의 국가대표가 그의 손을 거쳤다.

대전에서 다시 꿈꾼다

2003년 11월 수원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그는 “이제는 꿈을 꾸지 않는다”고 되뇌었다. 현장을 떠난 그에게 숭실대는 고졸 출신임에도 교수직을 주며 강의를 맡겼다. 일간스포츠(IS) 해설위원으로 2006독일월드컵을 취재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은 그는 현장 복귀를 꿈꿨다. 그리고 난파해 가는 대전 시티즌에서 4대 감독의 자리를 맡겼다. 그의 취임 일성은 50년 축구인생을 요약한다.

“내 축구 철학은 80%의 선수는 직접 키우고 20%는 좋은 선수를 영입한다는 것이죠. 대전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맡을 때보다 내가 떠난 이후가 더욱 빛나는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호 감독은 1일 열린 부산과의 FA컵 16강전에서 일선 복귀 후 첫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 대비해 훈련하던 김 감독에게 그럴듯한 학력으로 남을 속이는 세태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오죽 힘들었을까 싶지만 고졸 출신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세상인데…. 거짓을 스스로 용납할 용기라면 현실과 맞서 싸워봐야죠”라고 답했다. ‘김호다운’ 대답이다. 세상은 ‘고졸’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겼지만 그는 세상의 허위를 정면으로 돌파해냈으므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