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나의 힘, 나의 삶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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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03면

정경화(59)씨가 미국 뉴욕의 명문 음악학교 줄리아드로 유학을 떠났던 1960년. 한국은 6·25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을 뿐이었다. “동양인이 서양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신기하게 여기더라”는 게 정씨의 기억이다. 70년 정씨가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과 클래식의 명가 ‘데카’ 레이블로 데뷔 앨범을 냈을 때도 한국은 여전히 못살고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양적인 얼굴이 세계적 음반 레이블의 재킷에 나왔을 때 한국은 ‘음악이란 이름의 자부심’으로 힘을 얻었다.

줄리아드 교수 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정씨가 67년 레벤트리 국제 콩쿠르에 도전할 때에는 주위의 많은 사람이 걱정했다. 핑커스 주커만이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의 전폭적인 지지로 1위를 이미 맡아놨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출전을 말렸지만 그는 특유의 지독한 집념으로 결국 공동 1위를 따냈다. 축구로 치면 ‘연장전’과 같은 반복 연주 끝에 얻은 우승이었다. 7남매와 시끌벅적 살던 서울에서 외로이 뉴욕으로 떠나 언어장벽과 인종차별에 부대꼈던 소녀가 보란 듯 세계 무대를 제패한 것이다.

그 뒤로 시카고 심포니·뉴욕필·베를린필·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중요한 교향악단과 무대에 설 때마다 세계는 정씨를 반겼다. 작곡가들은 그에게 새로운 곡을 헌정했고 ‘아시아의 마녀’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한 음정, 날카로운 음색이 무대를 사로잡았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결혼을 반대하던 스승 이반 갈라미언에게 “결혼과 연주 둘 다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어머니가 된 뒤 따뜻한 음색으로 연주의 수준을 높였다.

그렇게 당찬 정씨가 몇 해 전부터 연주회를 취소하기 시작했다. “병 때문에 독주회가 취소됐다”는 소식이 종종 들어와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급기야 2005년 9월 23일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내한했던 정씨는 “손가락 통증으로 연주를 할 수 없다”며 당일 공연을 취소했다. 이틀 후에는 프로그램을 바꿔 힘겨운 연주를 했다. 이후 그의 연주도 녹음도 들을 수 없었다. 부상 회복이 더디고 건강도 악화됐다는 소문만 떠돌았다.

연주를 취소하기 2주 전, 정씨는 서울 바로크 합주단과 서울 무대에 올랐다. 세계 무대에 진출한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와 그를 지지하는 후배 실내악단의 화음에 객석에서 열광이 터져나왔다. 당시 연주를 지켜봤던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58)씨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던 터라 연주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평생 바이올린을 잡고 고단하게 산 사람끼리 느끼는 연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일곱 살에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데뷔한 정씨는 내년이면 환갑이다. 오로지 바이올린과 음악에 바친 육십 평생이 이제 빛을 발한다. 모교 줄리아드 음대가 그를 교수로 초빙했다. 정씨가 열두 살에 처음으로 부딪혔던 낯선 곳, 가난한 나라의 소녀를 세계 무대로 이끌어냈던 바로 그 학교에서 다음 세대 연주자를 길러낸다. 앞으로 우리는 독하고 완벽한 ‘정경화 표’ 연주 대신 그가 애정으로 기른 연주자의 음악 속에서 그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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