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선 ‘진짜’ 예의를 지켜주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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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15면

10년 전쯤인가 휴일에 사고 소식을 전하는 TV 뉴스를 보다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현장에서 리포트 하는 사람은 듣기만 해도 갓 입사한 신입 기자임이 분명했는데 마이크를 앵커에게 넘기면서 “XXX 선배! 나와주세요” 하고 부른 것이다. 이른바 언론계의 ‘군기’가 바짝 든 기자의 귀여운 실수를 보며 속으로 ‘얼마나 선배가 무서웠으면’하고 ‘큭큭’댔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요즘 오락프로를 보면 실수도 아닌 이상한 호칭에 기분이 나빠진다. ‘상상플러스’에서는 MC 이휘재가 진행자인 최송현 아나운서에게 “송현아!”라고 불러댄다. ‘무한도전’의 MC 유재석은 PD에게 “태호야”라고 부르고, 방송사 숙직 특집에 나온 PD는 개그맨들을 ‘형’이라고 호칭했다. 아니, 자기네들끼리야 형 동생 할 수도 있고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나 아나운서, PD한테 ‘누구야’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지만 수백만 시청자가 보는 TV에서 그런 마구잡이 호칭이라니. 이러다가 “언니” “오빠”하면서 방송하겠군 싶었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오락 프로가 늘어나면서 서로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유행처럼 돼버렸다. 남에게 호통을 치고 남을 깎아내리는 캐릭터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자신들의 친소(親疎)나 상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서로 “야 임마” “이 자식이” 같은 막말을 던지고 거리낌없이 “~야” 같은 호칭을 쓰는 건 거북하고 무례해 보인다. ‘옛날 TV’에서는 얼마 전부터 나이 많은 출연자들이 반말이나 비속어를 쓰면 벌칙을 받는 규칙을 도입하기도 했는데, 아무튼 최근 들어 확 늘어난 듯한 오락 프로의 막말 방송은 자제가 필요해 보인다.

무례한 호칭도 그렇지만 지나치게 상대를 공대하는 듯한 호칭도 거슬리긴 마찬가지다. 토크쇼에 나온 연예인들은 서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다고 “선배님, 선배님”하고 부른다. 거기다 나이가 한 50줄만 넘어가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프로그램에서는 그분들에게 누구 할 것 없이 “어머님, 아버님”이란 호칭을 붙인다.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남발되는 게 진짜 학교에서 날 가르쳐주신 선생님들한테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미장원 같은 데서도 “누구 선생님”이라 하지 않고 “누구 디자이너”라고 부르려 애쓴다.

선생님 호칭을 아무데나 붙이는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이 좀 과민한 것이라 쳐도 일단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할 때는 그 인물이 아무리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높임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게 보인다. 우리 모두 학교 다닐 때 배우지 않았나. 더 높은 사람 앞에서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지칭할 때도 공대를 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TV 출연자들이 ‘시청자가 가장 높은 사람이다’라는 기준만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선배님이니 선생님이니 하는 호칭을 마구 붙이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나이가 많고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도 “~씨”로 부르는 게 제대로 된 호칭이고 “어머님 아버님”하는 것도 “어르신”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연예인들이 늘 내세우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책임감’은 음주운전이나 사고 때만 느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언어 생활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평소 자신의 언어 생활에서 가장 크게 느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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