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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 받으면서 먹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앨런 파머 약력
1982 스위스 레로쉐대 호텔경영학과 졸업(1982)
1990 세계조리사협회(WACS) 조직위원회 위원장(1990)
싱가포르항공 기내식 조리 교육
세계 주요 요리 대회 심사위원 역임


요리 경연대회를 다룬 영화에서 심사위원들은 대개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다. 맛을 보기 위해 음식을 씹는 즉시 내뱉는다. 간간이 물로 입을 헹궈내기도 한다. 실제 요리 경연대회는 영화와 달랐다. 심사위원들은 비록 시간에 쫓기기는 했지만 줄곧 음식을 즐겼다. 수없이 많은 요리를 조금씩, 그러나 맛있게 먹었다. 40년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이자 15년째 국제 요리 경연대회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앨런 파머(사진 가운데.60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심사위원들은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긴다”고 말한다. 음식을 얼마나 먹느냐로 해당 팀에 대한 평가를 지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음식에 살짝 입만 대는 경우라면 평가가 나쁠 수밖에 없다. 씹고 뱉는 식의 요리 대회 심사는 영화적인 과장이라는 얘기다.

스위스 출신으로 주로 아시아권에서 요리를 하거나 심사해온 파머는, 지난달 25∼26일 코엑스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제8회 호주축산공사 블랙박스 요리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대회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블랙박스 타입의 경연 대회. 행사 첫날 요리에 쓰일 재료를 공개하고, 참가 팀들이 같은 재료로 하루 동안 4가지 코스의 요리를 만들어 겨루는 방식이다. 8년 전에 시작된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내년 두바이에서 열리는 세계 블랙박스 요리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준다.

세계적인 요리 대회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몇 년에 한 번씩 열린다. 내년 두바이 블랙박스 요리 대회는 2000년, 2002년, 2005년에 이어 네 번째다. 스포츠처럼 참가국간의 대결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 대회는 아직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 대회 축에는 끼지 못한다. 독일·룩셈부르그·싱가포르 요리 경연대회가 3대 대회로 꼽힌다. 독일과 룩셈부르그 대회는 4년마다 열리지만, 싱가포르 대회는 격년제로 열린다.

요리 대회의 규칙에 대한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도 강하다. 정해진 경기 규칙이나 평가 방식이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모든 요리 경연대회에는 세계조리사협회(WACS)가 정한 엄격한 규칙이 있다. 세계 각국의 영향력 있는 조리사들이 대부분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이 기구는 요리에 대한 평가 기준도 까다롭게 정해놓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심사 비중으로 치면 약 70% 정도. 그 다음 기준은 재료의 활용도, 요리의 독창성이다.

다만 각 대회별로 평가 항목은 조금씩 달라진다. 물론 심사위원마다 평가 방법도 다양하다. 이번 블랙박스 요리 대회의 경우는 평가항목을 공개하지 않았다. 앨런 파머를 비롯한 세 명 심사위원들은 기자가 기웃거릴 때마다 심사표를 감추느라 바빴다. 기준과 채점 현황이 빠짐없이 공개되면, 펀치를 날릴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는 아마추어 복싱처럼 요리 대회가 싱거워진다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심사위원의 심사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파머가 메인 코스인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먹는 데 반해, 다른 두 위원은 육즙을 수저로 떠먹거나 향을 맡고 모양새를 보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재료나 맛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취향이 심사에 반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심사위원들은 맛에 대한 평가 이전에 참가자들이 요리 대회의 룰을 엄격하게 지켰는지부터 점검한다. 블랙박스 대회의 경우는 주최측이 제공한 재료만 사용했는지를 강도 높게 따졌다.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조리된 재료를 꺼내게 해 원래 제공한 것과 즉석에서 꼼꼼히 비교했다. 파머는 한 참가팀 앞에서 재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심지어는 “당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까지 연발하기도 했다. 상대방으로서는 모욕감을 느낄만한 언사지만 요리 대회가 어떤 스포츠보다도 엄격한 경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주요 감점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사위원이 룰이 아니라 맛 때문에 어떤 참가팀 앞에 오래 머문다면 그 팀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앨런 파머를 비롯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국내 주요 호텔 조리사들을 포함해 20개의 요리 팀이 참가한 이번 대회에서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 팀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심사위원들이 음식을 많이 먹은 것은 물론 요리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물어보았다. 이 호텔은 이번 대회의 우승팀으로 결정됐다.

요리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음식을 시식한다는 것, 즉 음식도 일로 먹는 것이라면 가끔 고역이지 않을까?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심사위원이 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26일 오후 네 시부터 시작된 심사를 위해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심사위원장격인 파머는 “오랫동안 굶은 후에도 2∼3시간에 걸쳐 천천히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미식가라야만, 먹으면서 돈을 받는 요리 대회의 심사위원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뭔가를 먹으려고 돈을 내는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셈이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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