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테러의 본질 접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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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계엄령』은 만들어진지 20년만에 국내에 개봉된 영화다. 그리고 이 시차만큼이나 낡아 보이는 영화다.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정치적 조종이란 소재는 이제는 상식화한, 그래서 굳이 들춰낼 필요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우리에겐 좀더 편히 즐길 수 있는 영화,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영화가 필요한건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 대해 낙관해도 좋다는 전제가 무너진다면 이런 불만은 순식간에 사치스러운 것이 된다.
『계엄령』은 마치 기록영하처럼 타이틀 없이 시작된다. 라틴 아메리카의 한 도시에서 군인과 경찰에 의한 삼엄한 검문·검색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지금 우루과이의 반정부게릴라인 투파마로스에 의해 납치된 한 미국인을 찾고 있다.
결국 경찰은 버려져있는 차량에서 미국인 필립 산토르의 시체를 발견한다. 게릴라들의 만행(?)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우루과이 국회는 극장을 결의하고 성당에서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진다.
이 시점에서 영화는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산토르가 납치돼 죽음을 당하기까지의 1주일간을 보여준다.「월요일」이란 자막과 함께 미국 국제개발원의 경제조사원으로 우루과이에서 파견근무중인 산토르가 납치되는 과정이 보여진다. 그에 대한심문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그가 사실은 미 정부에 의해 보내진 고문·첩보전문가라는 것을 알게된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몇 년 전 국내에서도 개봉됐던『Z』에서 보여주었던 멜러드라마적인 전개를 탈피하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이 정치테러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정치적 개입이란 문제도 우직한 정의감에 의해 타파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성숙함에 도달하고있다. 특히 산토르의 후임자가 도착하는 마지막 장면의 아이러니는 이 억압의 구조가 그리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코스타 가브라스의 작가적인 역량에 비해 여전치 이 영화는 불만을 남긴다. 탐정영화의 플롯을 차용해 긴장감을 올리려는 그의 시도는 정치적인 긴장감을 오히려 감소시키는 역기능을 남기고 만다. 더구나 그의 다분히 절충주의적·정치적인 시각은 그가 표방하는 진보성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하긴 그 수많은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한편의 제대로 된 정치영화도 만들어내지 못한 우리입장에서 이는 아마도 호사스러운 입방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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