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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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림=김태헌

그 날 밤 엄마와 둥빈 그리고 나의 방에는 오래도록 불들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둥빈은 아침도 먹지 않고 일찍 학교로 가버렸다. 내가 식탁으로 나가니까 엄마가 푸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둥빈이는?”

내가 묻자 엄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힘없이 대답했다.

“학교 갔어. 그래도 책가방 챙겨서 갔어. 다행이지 뭐야. 그래 다행이야. 학교라도 가주니까. 요즘 학교도 안 가는 아이들도 많다는데….”

나는 우유를 한잔 따라서 엄마 앞에 앉았다. 엄마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엄마… 둥빈이 마음도 아플 거야. 나도 그렇게 반항했었어. 아빠한테. 어제 둥빈이 보니까 꼭 날 보는 거 같아서….”

내가 말했다.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엄마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알아. 엄마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외할머니한테 많이 반항했던 거 같아. 왜 같은가… 하면 분명 반항을 하긴 많이 했는데 잘 생각은 안 나거든.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서운하게 했던 거는 하나하나 다 생각나는데, 내가 외할머니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외할머니도 엄마 때문에 많이 우셨어. 나중에 너 같은 딸 꼭 낳아봐라, 뭐 이런 말도 하셨지. 외할머니 말대로 내가 당해보니까, 부모 되는 거 너무 손해나는 일이다. 뭐 이런 법이 다 있어? 무조건 참아야 하고 져줘야 하고…. 씨이.”

마지막 대목을 이야기하며 엄마는 피식 웃더니 스스로에게 하듯 다시 말을 이었다.

“괜찮아. 엄마가 어제 책을 찾아보니까 남자 아이들 사춘기 때 반항하는 게 더 낫대. 반항도 안 하는 게 더 무서운 거래…. 다만 엄마는 그동안 어린 둥빈이가 겪어야 할 일들 생각하면서 미안하고… 또 마음이 아팠어.”

그리고 그날 밤 둥빈은 또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둥빈이 들어오자 무슨 말인가 해보려고 했지만 둥빈은 방문을 탁, 하고 닫고 들어가 잠가버렸다. 엄마가 둥빈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은? 이 녀석아 반항을 해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둥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겨울을 재촉하듯 비가 내렸다. 교과서를 펴놓고 있다가 밖으로 나가보니 엄마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도 저녁을 거른 거 같았다.

“엄마 술 마셔?”

내가 물으니 엄마는 “응” 하고 대답하더니, 비 내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 곁에 앉았다.

“나 대단한 엄마 아닌데…. 나, 모성 같은 것도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둥빈이가 저러니까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 돈을 버는 것도, 명성을 얻는 것도, 의미 있는 글을 써서 설사 세상의 문학상이란 상을 다 받는다 해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니? 다 부질없게 느껴져. 예전에 말이야 위녕…, 내가 너희 아빠랑 둥빈이 아빠 혹은 제제 아빠에게 그랬거든. 세상을 다 구원하는 척하면서 자기 아내는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이젠 내가 너희에게 그런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기가막혀.”

엄마는 천천히 말하며 소주잔을 비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의 침묵 사이로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처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힘이란 힘은 다 빠져나간 듯이 보였고 엄마 특유의 씩씩함 같은 것이 사라져 약하고 늙어보였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늙어갔을 때를 상상했다. 엄마는 언제나 나이보다 젊고 유능하고 자신만만한 줄 알았는데, 이제 엄마는 늙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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