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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앵글'에 갇힌 무기력한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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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 협상이 한계에 부닥쳤다. 정부는 31일 오전 7시 청와대에서 긴급 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었다. 이날 새벽 탈레반은 심성민씨를 추가 살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 중 누구도 인질 석방을 위한 속시원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인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카불(아프간 수도)에 머물고 있는 가운데 탈레반은 제3, 제4의 인질 살해를 공언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탈레반과 미국 정부, 아프간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교섭과 협상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협상 수단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매일 "사실 확인 중"

인질 맞교환 문제를 놓고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한국 외교력의 바닥이 드러나고 있다. 정보력과 협상력의 부재를 지적하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31일 오전 1시40분 외신을 통해 인질 추가 살해 소식이 알려졌으나 "사실 확인 중"이라는 언급만 반복했다. 피살 사실을 공식 확인해 준 것은 12시간이 넘게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부 관계자들은 전날 오후 10시40분 '협상 시한이 이틀간 연장됐다'는 아프간 관리의 말만 믿고 퇴근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현지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정부는 아프간 정부보다 미군 측과의 공조체제를 통해 현지 정보를 얻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2일 급파된 조중표 외교부 제1차관이 이끄는 현지 협상팀은 10명이 넘는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프간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군의 정보에도 구멍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취약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협상 전략을 짜고 현지 협상팀이 아프간 정부를 내세워 탈레반과 '접촉'하는 게 정부 대응의 현주소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이 요구하는 인질 맞교환에 대해 '유연성을 보일 수 없다'는 원칙론을 되풀이하고 있다. 탈레반이 여성을 인질로 잡고 살해 위협을 가하는 데 대해 아프간 정부는 '이슬람 율법을 어긴 것' '범죄 행위'라고 공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여성 피랍자를 석방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상황을 반전시킬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맞교환 열쇠' 미국 설득 못하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탈레반 수감자-한국인 인질을 맞교환하는 방안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만큼 정부의 대미 외교는 절박하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전화통화를 했다. "사태 해결 과정에서 긴밀히 협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송 장관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가 열릴 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존 네그로폰테 국무부 부장관을 만날 예정이다. 북핵 문제 못지않게 아프간 인질 사태가 중대 현안으로 부각된 것이다.

미국의 입장이 바뀔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은 "테러 세력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히 지키고 있다. 인질 추가 살해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미 정부 관리들은 "한국 정부의 인질 구출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미국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은 탈레반의 인질 맞교환 요구를 수용할 경우 '테러와의 전쟁'의 명분을 잃고, 앞으로 알카에다 등 테러 조직과 탈레반 무장세력의 인질 납치를 부추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미 정부의 정책 기조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최근 "미국의 개입 없이 사태를 풀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의 지원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가 정책 변화를 유도하지 못할 경우 자칫 반미 감정만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과 '한.미 동맹' 사이에서 대미 외교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다.

탈레반과 '직접 접촉' 통로 없어

탈레반 무장세력은 한국 정부와 직접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추가 살해를 강행할 태세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어떤 입장인가. 정부는 그동안 "다양한 협상 채널로 탈레반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해 왔다. '직접 접촉'이 아니라 '접촉 유지'다. 간접 협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사태 초기부터 '테러단체와의 직접 협상은 없다'는 원칙 아래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간의 교섭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프간에 파견된 문하영 외교부 본부대사가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고 현지 대책회의에만 참석하는 것도 측면 지원의 일환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래서 얻은 게 뭐냐"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정부는 "아프간 정부가 중요하다"는 말을 반복하나 정작 아프간 정부는 핵심 해법인 탈레반 수감자-한국인 인질의 맞교환을 거부해 왔다. 아프간 대통령궁 하마이온 대변인은 31일 "탈레반이 요구하는 맞교환은 절대 없다"고 재확인했다.

그래서 세 번째 인질이 살해되기 전에 한국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서라는 주문이 나온다. 현지에 머물고 있는 백종천 대통령 특사와 조중표 외교부 제1차관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주목된다.

이철희.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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