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3군 힘 모아 호국 통일 번영|삼정도에 담은 5공 통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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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칼은 고래로 권력의 압축이고 권위의 상징이다. 명검에는 영웅의 신화가 서려있고 새로 천하를 평정한 인물들은 자신이 내세운 창업의 대의를 보검 속에 녹여 넣으려고 한다. 각군 지휘관이 청와대에 보직 신고할 때 대통령으로부터 받는 삼정도는 나름의 역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이 칼이 장군에 대한 국가 통수권자의 신임과 명예의 상징으로 주어진 것은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다.
83년3월 초순 장세동 청와대 경호실장은 한 민간인과 은밀히 마주앉았다. 그는 『칼에 대한 전대통령 각하의 관심과 기대가 각별하십니다』고 했고 상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에 남을 훌륭한 칼을 만들어 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짤막한 대화가 끝나자 장 실장은『이 작업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주십시오. 그리고 다른 누구에게도 이 칼을 만들어 주지 마십시오. 칼의 권위가 떨어져선 안됩니다』고 당부했다.
장 실장을 만난 민간인은 도검장인 전용하씨였다. 이렇게 해 대통령이 「하사」하는 지휘도의 제작이 시작됐으며 그 전통은 문민 김영삼 대통령에게까지 전승되고 있다. 김 대통령이 최근 새로운 군 지휘부의 신고를 받으면서 리본을 매달아주는 긴칼이 바로 삼정도다.
삼정도의 탄생 과정은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으며 중앙일보의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장인 전씨는 3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귀국,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6·25때 군복무를 마친 뒤 다시 일본에 건너가 칼에 심취했다. 그는 일본 도처에 성덕태자검 등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칼이 보존돼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일본에 칼 기술을 전수한 한국의 전통 도검 제작 기술 복원에 인생을 걸었다. 이때가 27세. 그는 어느 정도 칼 제조 기술을 익힌 뒤 60년대에 귀국한다.
삼정도는 전대통령의 독특한 개성으로부터 발안되었다. 전대통령은 82년12월 도검장인 전용하씨를 전씨 종친회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전씨가 한국의 전통칼을 복원하기 위해 30여년 외길을 걸어온 최고수란 말을 듣고 『우리 문중에 이런 분이 계신줄 미처 몰랐다』며 구체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전씨는 조선시대 왕들이 왕권의 상징과 종묘수호의 뜻으로 갖고 있었던 「사인검」의 유래를 설명했다. 사인검은 12간지로 따져 임인년·임인월·임인일·임인시에 만드는 것으로 60년에 한번씩 세상에 나오는 명검이라는 얘기에 전대통령은 흥미를 느꼈다.
전대통령은 특히 사인검에 새져진 명문에 무인 출신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인검에는 「추산악 현참정」 (산처럼 쌓인 악을 하늘을 대신해 바르게 벤다)이란 글귀가 상감 되어 있다. 전씨는 사인검에 얽힌 비화를 자세히 적어 서면으로 청와대에 보고하기도 했다. 군장성 출신 Q씨의 회고.

<종친회서 명장 만나>
『사인검의 명문은 5공이 내건 정의사회구현과 통하지요. 집권당 (민주정의당) 이름에 정의라는 글자를 넣을 정도로 정의는 신군부 세력엔 매력적인 단어였지요. 전대통령은 역사의 명검에 새져진 명문을 현재의 통치 이념과 연결시킬 수 없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을 겁니다. 삼정도는 사인검에서 출발한 셈이지요.』
12·12로 군부를 평정하고 집권한 전대통령은 군의 일사불란함과 일체감을 알릴 상징물로 「대통령 하사 지휘도」를 착안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대통령은 신군부가 중심이 된 12·12와 5·17을 거치면서 군내 단합과 그들을 중심으로한 군사 문화의 정비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육군의 사단장·소장급에는 육사 11기 선두 주자부터 9·10기, 8기 후미그룹, 그리고 종합 학교·갑종·배속·현임 장교 등 출신과 교육 과정이 복잡하게 섞여 이질감이 깔려 있었다. 12·12에서 승리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측은 노장층인 정승화·김재규 라인을 대거 퇴진시키고 정규 4년제 출신들로 전면 물갈이했다.
『이런 군의 변화 속에서 전대통령은 장성들의 충성을 확보·확인하는 존재로 삼정도를 착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수적으로 군사 문화를 새롭게 하는 의미도 따랐겠지요. 전대통령의 11기 출신들은 과거 선배들과 무언가 다르고,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자부심과 강박관념 속에 줄곧 군 생활을 해왔지요. 그런 의식이 군 최고통수권자가 정식으로 주는 지휘도를 구상하는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죠.』 당시 청와대에 근무했던 Z씨의 분석이다.
장세동 경호실장은 전용하씨에게 칼 제작을 맡기기 전에 몇가지 기본 검토를 했다. 칼이 실전용이 아닌 의전용이므로 날을 세우지 않는 것으로 처음 계획했다. 날이 있으면 녹슬 우려가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그러나 전대통령이 명쾌하게 수정 지시를 했다. 『일국의 통수권자가 주는 칼인데 날이 없으면 되겠는가. 날이 없는 칼을 만든다면 장난감을 준다는 것 아닌가. 날에 녹이 슬면 정성 들여 손질하고 닦으면 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인격 수양이 된다.』

<장성 충성 확인 척도>
「비수처럼 날을 살려라」는 지시는 도검 장인에겐 신나는 일이다. 칼 만드는 사람에겐 날을 세우는 것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대통령과 장 실장은 칼이 낯설지 않다. 정규 육사 출신들은 졸업식 분열을 할때 수석 졸업자나 대표 화랑이 예도를 쓰는 장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우리 군에선 지휘도보다 지휘봉이 익숙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지휘봉을 준 적은 있지만 지휘도 하사는 없었다.
당시 3군사령관이던 정호용 의원은 『남미에선 사관 학교 졸업 때 지휘도를 줍니다. 미국은 지휘봉을 장군의 상징으로 갖고 있고, 삼정도는 동양적인 것을 추구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볼수 있지요』라고 해석했다. 그는 삼정도 제작에는 관여치 않았다.
청와대 주변에 지휘도가 활개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 차지철 경호실장 시절 때였다. 그는 정부나 국회 고위 인사를 불러놓고 경복궁30 경비단 연병장에서 경호부대 사열식을 하면서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의전용 칼을 만들어 대대장급 이상에게 차도록 했다. 경호실 차장보들에게도 사열용으로 준 적이 있었다. 차 실장은 스틸웰과 베시 주한 미군 사령관이 이임할 때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긴 지휘도를 주기도 했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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