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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볼 ⑫ 베어벡의 '엎지른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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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변석개(朝變夕改)라고 해야 할까. 핌 베어벡 감독에 대한 세간의 평가 말이다.

베어벡은 아시안컵 기간 내내 '무대책.무기력' 감독으로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일본과의 3~4위전을 승부차기로 이기고, 곧바로 사퇴 선언을 하자 여론은 급반전했다. '1.5군 데리고 3위 한 게 어딘데'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니 계약 기간은 채워야 할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졌다. 심지어 '베어벡 사퇴 반대 서명운동'까지 나왔다.

국가대표 감독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경기 내용과 결과는 물론 어떤 원칙과 철학을 갖고 선수단을 이끄느냐도 평가의 중요한 잣대다. 팀의 현황과 방향을 팬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비중도 커지고 있다. 그래서 2002년 거스 히딩크는 자신의 심복과 같은 얀 룰프스에게 언론담당관을 맡겼다.

베어벡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축구협회.프로구단.언론.팬)과의 소통 과정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고,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안 해도 될 말을 하기도 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 버리기도 했다.

그는 아시안컵을 앞두고 "4강에 못 들면 사퇴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술 더 떠 대회 내내 우승을 장담했고, 이란과의 8강전 후에는 "(이라크와의) 준결승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승만이 의미가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혀 버렸고, 3위를 하고도 사퇴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전술적 실수를 그대로 시인해 버리는 장면도 있었다. 바레인에 1-2로 진 뒤 외신기자가 "왜 6명이나 선발 선수를 바꿨나"고 물었다. 베어벡은 "결승까지 6경기를 해야 하는데 경기 중간에는 훈련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경험 많은 선수를 투입했다"고 대답했다. 당장 국내에서 "경기가 연습이냐. 바레인이 그렇게 만만한 팀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냥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선발로 세웠다"고 넘어가도 될 상황이었다.

그는 '전술이 단순하다'는 평가에 상당히 예민해 있었다. 이라크와 준결승 전날 필자가 "측면 공격에만 치중하는 건 선수들이 중앙 공격을 소화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측면 공격만으로도 득점이 가능해서인가"라고 물었다. 베어벡은 "포백을 쓰는 이란이 한국전에 스리백으로 바꾸는 바람에 졌다. 2002 월드컵 때는 한국 언론이 스리백이냐 포백이냐로 떠들더니 지금은 투톱이냐 스리톱이냐 갖고 떠드느냐"고 했다. 포메이션의 변화를 물은 게 아니었는데 그는 흥분했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날 오후 훈련이 끝난 뒤 베어벡은 기자들 옆을 지나가면서 "투 스트라이커, 스리 스트라이커"라며 비아냥댔다.

베어벡은 분명 성실한 지도자였고, 올림픽팀-대표팀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의 방향을 잡은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볍고 때론 순진하기까지 한 언행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베어벡은 한국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앞날에 행운을 빈다.

정영재 기자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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