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칠레 FTA 국회비준 또 무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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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표를 의식한 국회의원들의 얄팍한 계산 속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다시 무산됐다.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것은 물론 다른 나라와 추진 중인 후속 FTA 협상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게 됐다. 우리나라와 FTA를 추진하고 있는 일본.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이 앞으로 한국 정부와 협상을 계속한다는 보장이 없어졌다. 정부 간 FTA에 합의해도 국회에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당장 칠레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관세를 꼬박 물어야 하는 자동차.휴대전화.가전제품 등 주요 수출상품들이 무관세로 들어오는 다른 나라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못 믿을 나라=한.칠레 FTA는 정부가 서명한 뒤 비준받지 못한 최초의 FTA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국회는 2월 임시국회로 처리를 연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총선이 4월로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정치권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총선 국면에 들어서면 농민단체들이 표를 무기로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에게 한.칠레 FTA 반대를 강요할 것으로 보여 비준이 사실상 물건너 간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나 싱가포르.아세안 등이 우리 정부의 말을 믿기 어렵게 된다. FTA에 합의해도 비준을 못 받는다면 굳이 FTA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예정된 한.일 FTA 협상에서 일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내 업계가 가만 있을 리 만무하다. 나라 안팎으로 FTA를 추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가 FTA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FTA를 통해 시장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이 막혀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1백84개의 FTA가 발효됐으며 FTA 체결국 간의 무역 규모는 2002년 세계 교역의 43%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온 세계가 FTA로 실익을 챙기는 사이 우리나라만 외톨이로 남는 것이다.

신장범 주(駐) 칠레 대사는 "칠레 정부는 한국 국회에서 한.칠레 FTA가 무산된 데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회에서 일부 의원들이 단상에까지 나와 반대하는 모습이 칠레 일간지에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됐다"고 전했다.

◇"표에 눈 먼 의원들"=정인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FTA 연구팀장은 "국회에서 FTA 비준안을 무산시켰다고 해서 농산물 시장 개방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눈앞의 표만 의식해 국익을 망각한 한심한 행태"라고 꼬집었다.

한양대 연구 결과 한.칠레 FTA로 국내 농민의 소득 감소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6천억원을 밑돈다. 이에 반해 FTA 지원 특별법은 이의 두배를 웃도는 1조2천억원을 농촌에 지원하도록 돼 있다.

FTA 지연으로 칠레시장에서 우리 상품의 경쟁력에 빨간 불이 켜졌다. 칠레는 지난해 2월과 2002년 11월 유럽연합(EU).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 각각 FTA를 발효시킨 데 이어 이달부터 미국과의 FTA도 시행했다. 관세를 전혀 물지 않은 이들 나라의 제품은 수출할 때마다 6%의 관세를 물어야 하는 우리 제품을 몰아내고 있다. 2002년 일본에 이어 2위였던 국산 자동차의 칠레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4위로 추락했으며, 휴대전화.가전제품 등도 타격받고 있다.

KIEP는 한.칠레 FTA가 체결되면 첫해에 대(對) 칠레 수출이 2억7천만달러, 수입이 1억1천만달러 증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10년 뒤에는 수출이 5억4천4백만달러, 수입이 2억2천4백만달러로 늘어 3억2천만달러의 무역수지 개선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정재홍.김영훈 기자

<사진설명>
한.칠레 간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을 위해 대통령까지 나섰다. 8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례 없이 국회를 전격 방문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FTA 국회 동의를 당부하고 있다.[오종택 기자<jongta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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