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未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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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애비는 종이었다.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만큼 평이 극단으로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다. 미당이 스물세살 나던 해 쓴 '자화상(自畵像)'은 평가 논쟁의 출발점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종의 아들'을 선언하고 '뉘우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은 천박했던 삶을 강요했던 봉건적 질서에 대한 당당한 부정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대로 미당의 제자 고은(高銀)의 주장처럼 '노예 근성의 뿌리''수치심의 결여'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전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국화 옆에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를 암송하며 시인의 천재성에 감탄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당이 일제 말기에 쓴 친일시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마쓰이 송가)나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 생일 축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탄신 송가)를 떠올리면서 시인의 행적을 꾸짖을 것이다. 시인은 친일 행적에 대해 "일제가 그렇게 일찍 망할 줄 몰랐다"며 자성과 유감을 표명했지만 작품을 거둬들일 수는 없다.

평자들과 무관하게 정작 미당이 '자화상'에서 힘주어 말하고자 한 대목은 '이마에 얹힌 시의 이슬'일 것이다. 시는 그에게 늘 피 같은 생명이자 절대적 자아였기에. 실제로 미당이 한국 시문학사에 남긴 족적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미당의 팔순 잔치에서 황동규 시인이 "미당 시 읽지 않고 시 쓴 사람 나와보라"고 외칠 만하다.

관악산 자락 봉산산방(蓬蒜山房)을 서울시가 보존키로 했다. 비록 쑥(蓬)과 마늘(蒜)로 연명하진 않았지만 미당이 시선(詩仙)의 꿈을 품고 살았던 곳이다. 싫든 좋든 미당은 우리 현대사의 한 자화상이다.

런던=오병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