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지계획 추진하자/안병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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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의 심각한 경제침체와 날로 치열해지는 국제적 경제경쟁을 생각하면 김영삼정부가 경제활성화에 정책역점을 둔 것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근자에 경제성장이 크게 강조되면서 그나마 1987년 민주화 열풍 이래 조금 고개를 들었던 복지와 분배에의 관심은 급속히 뒷전으로 물러가고,우리사회는 다시 일렁이는 경제 제일주의의 큰 물결속에 급속히 빨려들어가고 있다. 지난 시대의 망령인 성장과 복지의 이분법이 이제 막 문을 연 문민시대에서 다시 부쩍 고개를 드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미미한 사회보장 지출
우리나라의 역대 위정자들은 성장과 복지 이분법의 철저한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선성장 후분배」라는 개발 철학과 복지지출은 자원의 비효율적 사용이라는 인식을 해왔고,그 결과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에 밀렸다. 그러다 보니 사회보장예산의 대정부예산 구성비가 6.4%,대GNP 비율이 1%미만이라는 실로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대 정권은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즐겨 사용했고,국가는 가능하면 돈을 안쓰면서 수익자부담으로 얼기설기 제도의 형식만 갖춰놓고 생색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 걸핏하면 과도한 복지지출로 허덕이는 서구복지국가의 「선진국병」을 우려하고 이에 대한 경고를 일삼았다. 사회보장비가 GNP의 1%인 한국을 수십년간 GNP 30%수준의 복지비용을 지출해 온 이들 나라와 평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집권 엘리트들의 이러한 부정적 복지관이 최근 국내외에서 일고 있는 경제적 위기의식 아래 다시 강하게 부상하고 있다. 단기적 조망인 「신경제 100일 계획」에 복지가 빠진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경식부총리의 말대로라면 성장 과실의 균배를 강조한다는 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에도 복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성장론자들은 경제가 잘 풀리면 그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도 「적하」될 것이므로 따로 복지문제에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국가는 자본축적 기능외에도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집단적으로 보장할 엄숙한 책임이 있다.
또 산업사회의 동태적 삶은 국가에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산업화·도시화는 계속 진행될 것이며 이러한 과정속에서 시민들은 개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갖가지 사회적·경제적 위험앞에 직면하게 된다.
○성장·복지는 보완관계
21세기를 조망할 때 앞으로의 인구노령화가 무엇보다 절박한 압력이다. 2000년이면 총인구중 65세 이상의 인구비율이 6.8%에 이르고,그후 다시 10년후면 10%에 이른다. 이미 핵가족 시대에 진입한 오늘 이들의 노후생활을 건강하고 인간답게 보살피는 일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과제다. 또 취업여성 인구가 급증하고 있으며,이에따라 전통적 가정내보호기능이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맞벌이 시대에 1백70만 어린이 맡길곳 없다」는 기사가 나온게 바로 며칠전이다.
그런가하면 현대인은 공간적·사회적·심리적 원자화와 소외에 크게 시달리고 있다. 이처럼 산업사회의 복잡한 삶,인구의 노령화,가족의 공동화,현대인의 실존적 갈등으로 우리 사회의 복지요구는 폭발적으로 증대되는데 국가는 계속 뒷짐만 지고 있다.
오늘의 시점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위정자들의 정책관의 변화다. 이제 성장과 복지를 보완관계로 설정,경제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을 기능적으로 통합시키고 정책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양정책의 효과를 동시에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스웨덴은 일찍이 작고 개방적인 수출경제에서는 인간 자본에 대한 집중 투자가 국제경쟁력 향상에 필수적이라고 보고 이 입장을 밀고 나갔다. 우선 통합적 가족정책을 통해 삶의 전과정에서 다양한 복지서비스와 소득이전·교육·예방적 건강보호·재활,그리고 성인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양질의 미래 노동력확보에 힘을 쏟았다. 그런가 하면 산업구조조정등에 따른 변화의 희생자들에게 단순히 실업수당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교육과 직업훈련·취업알선·지리적 이동을 통해 이들이 보다 역동적이고 생산성 높은 직종으로 옮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이른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그들은 사회정의의 손상없이 기술변화에 신축적으로 적응하며 양질의 인적자본을 양성,공급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경제성장과 생산성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
부자나라만이 복지와 분배에 관심을 두는게 아니다. 1880년대에 독일이 사상 처음으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을때 이 나라는 유럽에서 뒤진 나라였다.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발돋움할 때도 유럽의 가난한 변방국가였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성장과 복지의 조화로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됐다.
○정책 근본적 변화필요
1980년대에 영국과 미국에서는 대처와 레이건이 자유·경쟁·책임 및 능률을 외치며 반복지국가적 신보수주의 정책을 세차게 밀고 나갔다. 그러나 두나라의 신보수주의 정책은 오히려 양국의 소득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켰고 경제회생에도 실패했다. 복지와 분배를 외면한 경제제일주의의 잔해를 우리는 이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민정부는 이제 뭔가 달라야 한다. 내일의 삶에 대한 청사진없이 「다시 뛰자」고만 외치면 우리의 삶 자체가 너무 공허해진다. 「신경제 5개년계획」못지않게 「신복지 5개년계획」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연세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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