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이 연기맛을 알아? - 신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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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08면

“이 나이에 인기는 무슨. 다 뭔 소용이야. 사실 인터뷰니 뭐니 시간만 뺏기는 거지.” 불퉁한 말투가 외려 정겹다. 겹겹이 주름진 눈매가 편안하고 그윽하다. 시간 없단 말이 너스레가 아닌 것이 촬영 일정이 빡빡하다. 7월 23일 첫 전파를 탄 MBC 일일시트콤 ‘김치치즈스마일’ 촬영이 나흘에 걸쳐 있고, 8년째 이혼조정위원회 조정위원장으로 출연 중인 ‘사랑과 전쟁’ 녹화가 수요일마다 있다. 틈새 촬영작이 하나 더. 8월 20일 방영하는 SBS 대하사극 ‘왕과 나’에서 퇴역 내관을 맡았다. 사극은 ‘태조 왕건’ 이후 5년여 만이고, 내시 역할은 45년 연기 인생에 처음이다.

“연기 변신이다 그런 말은 당치 않아. 그냥 제의가 오는 대로 하는 거지. 아무래도 안 해본 걸 하는 게 나도 재미있고 보는 사람들도 좋잖겠어.”
그래도 최근 연기는 폭을 가늠키 어렵다. 허한 눈빛으로 “초코파이 드세요” 하던 치매노인 ‘미스타 리’(MBC ‘고맙습니다’)를 끝내기 바쁘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채업자(SBS ‘쩐의 전쟁’)로 변신했다. 종방연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생애 두 번째 시트콤(‘김치치즈스마일’)에 뛰어들어 말발 안 서는 괴팍한 사진사로 호연 중이다.

“예전에 시트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하고 CF 찍을 때 이미지 탈바꿈했다는 둥 하는 소릴 많이 들었는데, 내 입장에선 똑같이 연기일 뿐이었어. ‘니들이 게맛을 알아?’ 그 말도 촬영하면서는 그렇게 히트 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줄 몰랐어.”

컴퓨터를 전혀 못하니 네티즌의 반응을 알리 없다. ‘미스타 리’로 시청자의 눈시울을 적시고 포털사이트 실시간 인기검색어로 뜬 것도 주변 사람 말을 통해서 들었다.
“‘미스타 리’는 사실 그 전에 준비할 기회가 있었어. 고인이 된 신상옥 감독과 ‘겨울이야기’라고 해외 출품작을 준비했는데, 그게 치매노인과 며느리(김지숙 분) 이야기였거든. 그런데 최종 작업을 못하고 신 감독이 세상을 떠서 영화도 묻혀버렸지. 그때 치매노인을 돌봐주는 데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경험이 ‘고맙습니다’ 때 많은 도움이 됐어.”

준비한 대로 연기하는 것은 그의 철칙이다. 시트콤을 하면서도 그 흔한 애드리브 한 번 없다. 작품을 함께한 김병욱 PD는 오히려 이 점을 높이 산다. “상황은 코믹한데 본인이 심각할 때 웃음이 터지잖아요. 신 선생님은 과장된 느낌 없이 대본에 충실하면서도 그 맛을 잘 살리세요. 연기를 잘하시니 코미디도 잘 소화하시는 거죠.”

코믹한 변신 이전에 신씨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주로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감독 허진호)에선 비디오 작동법에 영 서툴러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진사 아들(한석규 분)을 애달프게 했다. ‘반칙왕’(감독 김지운)에선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어 하는 샐러리맨 아들(송강호 분) 때문에 복장 터지는 구식 노인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까칠한 듯 속정이 깊은 노부(老父)의 모습은 실제와 다르지 않다. 연극에 빠져 서른아홉에 한 결혼. 그해(1974년) 낳은 아들이 든든한 기둥이다. “고1 때 조기유학 보내서 대학까지 외국서 나오느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지. 지금은 분가해서 사는데 손자 데리고 자주 찾아와.”

30여 년 함께 산 아내만이 동반자다. “’사랑과 전쟁’ 하다 보니 별의별 황당하게 이혼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살다 보면 일탈할 수는 있지만 조강지처는…. 나도 많이 싸웠지. 통장에 넣어준 돈을 잘 관리해준 아내가 고맙지 뭐. 우리 나이엔 마누라가 먼저 가고 혼자 남을까 그런 게 걱정이야.”

늙는 것에 대해 서글픈 상념 따윈 없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좋단다. 문제는 체력.
“80까진 살 것 같은데, 그때까지 건강 유지하면서 연기하고 싶어. 나이 드니까 대본 덮으면 외운 게 생각 안 나. 그럼 한 번 더 봐야지. 그러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하거든.” 그래서 매일 양재천변을 8㎞씩 걷고 뛴다.

62년 연극 ‘소’로 데뷔한 그에게 연극은 시원(始原) 같은 곳이다. 기회만 되면 언제든 객석에서 관객을 만나고픈 생각이다. 몇 달이고 공동작업하는 게 힘에 부치면서도 “요즘도 (연극무대에 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데” 내년 1월까진 통 짬이 안 나서 아쉽다고.

내친김에 묘비명으로 ‘연극배우 신구 묻히다’는 어떨지 물었다. 갑자기 정색을 했다.
“에이, 자격이 안 되지.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몰라도. 젊은 날 배고파서 연극만으론 못 살겠더라고. TV로 CF로 샜어. 시트콤이 격이 낮다 그런 말이 아니야. 무대작업은 정말 힘들거든. 그러고 나면….” 한참 말을 쉬었다. “막이 내리면 아무것도 안 남아. 허전해서 다시 찾게 되지. 중독이지, 암.”
일흔둘에도 그런 열정에 중독될 수 있는가. 더는 묻지 못했다. 

감독들이 본 연기자 신구

허진호 감독(‘8월의 크리스마스’)

시한부 아들(한석규 분)을 말없이 지켜보는 따뜻하면서도 엄한 한국적 아버지를 염두에 뒀는데, 평소 TV로 눈여겨봤던 신구 선생님의 이미지가 딱 그렇더라. 시나리오를 보여 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셨고, 당시 신인이었던 감독을 믿고 따라주셨다. 지금도 생각나는 건 영화에서 아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방문을 닫고 말없이 바깥을 보는 장면이 있다. 촬영하는 날 꽤 추워 스태프가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아 드리려고 했다. 어차피 카메라에는 상반신만 잡히게 돼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며 맨발로 찬 바닥을 딛고 허허로운 눈빛으로 연기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연기해 오셨음에도 변함없이 헌신적인 자세였다. 작품 속에서 변하는 이미지에 관계없이 깊이가 느껴지는 분이라 앞으로 그 깊이를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같이해 보고 싶다.

김병욱 PD(‘웬만해선 그들을…’ 등)

두말할 나위 없이 방송 내외적으로 모범적인 배우이시다. 본격 코믹 연기는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가 처음이셨는데 코믹 대사를 치는(하는) 타이밍을 아시더라. 오랫동안 근엄하고 헌신적인 전형적 한국의 아버지상으로 각인돼 온 터라 그 이미지를 조금만 비트니까 소시민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캐릭터가 나와 흡족했다. 사실 어르신들 캐스팅은 다른 경우보다 더 조심스러운 게 전체적인 팀워크를 좌지우지하는 면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신구 선생님이나 이순재 선생님 같은 분들은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 1순위다. 후배들보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대본을 완벽하게 암기해 솔선수범하신다. 무엇보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즐겁게 연기에 임하시는 모습이 젊은 연기자들에게 귀감이 된다.  

LIFE STORY
1936년 서울 출생. 경기고 졸업 후 성균관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서울연극학교에 진학했다. 신순기라는 본명 대신 연출가 유치진씨가 지어준 신구를 예명 삼아 연극배우로 출발했다. 72년 KBS ‘허생전’으로 방송에 진출, 방송 3사 주요 배역을 두루 거쳤고 영화와 뮤지컬 쪽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3회, 99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연극) 등 굵직한 수상 경력이 있다.

드라마
KBS ‘새벽’(이승만 역) ‘개국’(최영 역) ‘상두야 학교 가자’(송종두 역), SBS 대하드라마 ‘토지’(문 의원 역) ‘쩐의 전쟁’(독고철 역), MBC ‘네 멋대로 해라’(고중섭 역) ‘고맙습니다’(미스타 리 역, 사진) 등 일일 시트콤부터 대하 사극까지 크고 작은 역을 두루 거쳤다. 2006 K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영화
73년 ‘귀향’으로 스크린 데뷔한 뒤 ‘8월의 크리스마스’(감독 허진호, 1998, 아버지 역, 사진) ‘북경반점’(감독 김의석, 1999, 한 사장 역) ‘반칙왕’(감독 김지운, 2000, 아버지 역) ‘로스트 메모리즈’(감독 이시명, 2002, 다카하시 역) ‘간 큰 가족’(감독 조명남, 2005, 김 노인 역) ‘박수칠 때 떠나라’(감독 장진, 2005, 윤반장 역) 등에 출연했다. 충무로 시절 초기엔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간첩·범인 등 악역을 주로 맡았으나 90년대 이후론 소시민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이 시대의 아버지상을 리드해 왔다.

드라마
KBS ‘새벽’(이승만 역) ‘개국’(최영 역) ‘상두야 학교 가자’(송종두 역), SBS 대하드라마 ‘토지’(문 의원 역) ‘쩐의 전쟁’(독고철 역), MBC ‘네 멋대로 해라’(고중섭 역) ‘고맙습니다’(미스타 리역, 사진) 등 일일 시트콤부터 대하 사극까지 크고 작은 역을 두루 거쳤다. 2006 K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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