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0호 18면

자라면서 곤충처럼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생명체는 없는 것 같다. 사람도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그리고 노년 시절의 모습이나 크기가 변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역사를 짚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변태를 거듭한 곤충은 시기에 따라 생김새가 너무 달라 둘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무시무시한 개미귀신이 자라 날개가 예쁜 명주잠자리가 된다. 우화(羽化)한 곤충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전의 애벌레나 번데기는 우리의 기준에서 보면 미추(美醜)의 대비가 분명하다.

주일우의 과학문화 에세이-이미지에 걸린 과학 <7>

곤충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이 3억5000만 년 전이라고 하니 그 역사는 파충류나 공룡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기록된 곤충의 숫자는 80만 종에 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숫자다. 아직까지 기록되지 않은 종들을 추산한 결과 600만에서 1000만 종이 존재할 것이라고도 한다. 인간이 속한 포유류의 종류가 기껏해야 4000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다양성을 보여준다. 종의 숫자만이 아니라 개체의 숫자도 어마어마해서 지구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곤충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곤충이 촘촘한 생태계의 그물에서 하는 역할은 다채롭다.

지구 생존의 큰 일꾼, 곤충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곤충의 역할은 아마도 꽃가루를 날라 식물들의 번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 과정에서 식물은 수정을 해서 후손을 남기고 곤충은 먹이를 얻는다. 요즈음 대두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꽃가루를 나르는 곤충의 종과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곤충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에서 에너지를 얻어야만 하는 지구상의 생물 모두에게 큰 재앙이다. 또 많은 곤충은 생태계의 물질순환에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딱정벌레의 역할이 두드러지는데 이 녀석들은 죽은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치우고 배설하면서 다른 생물에게 유용한 물질을 제공한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어떤 곤충은 아주 성가신 존재다. 모기나 이처럼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것들도 있고 바퀴벌레나 파리와 같이 병을 옮기는 것들도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해충이라 여겨지는 곤충들을 퇴치하기 위해 뿌려놓은 살충제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는 일찍이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잘 묘사해 놓았다. 살충제를 뿌리는 것은 많은 경우에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일과 같다. 대부분의 살충제는 해충만이 아니라 다른 곤충들, 새들, 그리고 인간 자신에게까지 예리한 비수를 들이댄다.

,b>곤충과 인류가 함께 사는 법
새들도 함께 침묵시킨 살충제의 두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요즈음은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해충과 싸우는 방법을 많이 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해충의 천적을 많이 키워서 해충을 줄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교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생태계를 해칠 가능성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무런 통제가 없다면 메뚜기는 한 철 안에 전 지구를 덮어버릴 만큼 빨리 숫자를 늘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백 종에 달하는 다른 곤충들이 메뚜기의 알, 혹은 메뚜기 성충을 잡아먹어 그 숫자가 조절된다. 이런 균형이 의도적으로 숫자를 늘려놓은 천적에 의해 깨질 경우, 없애려고 했던 해충이 주는 피해보다 훨씬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땅 위에 콘크리트를 덮고 하늘 끝까지 솟은 아파트에 살면서 이롭고 예쁜 곤충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성가신 해충들만 극성스럽게 사람들을 물어뜯는 세상이 된 느낌이다. 숲과 너른 자연에 기대 사는 곤충은 모두 두고 사람의 피를 빨거나 사람이 남긴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들만 사람들을 따라서 도시로 이사한 셈이다. 땅이 콘크리트로 깨끗이 포장될수록, 나무가 한 그루 더 잘려 나갈수록 많은 곤충이 살 곳을 잃는다. 모기를 잡아먹는 잠자리가 사라지면 모기가 더 극성을 부릴 것이라는 건 정해진 이치.

나 자신도 도시에서 나고 자라 곤충의 한살이를 쭉 지켜본 경험이 없으니 도시에서 자란 더 어린 친구들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곤충이 의지하고 살 숲과 물이 있는 공간에서 떨어져 살았다면 그들을 오래도록 지켜볼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계의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 곳에 가면 내가 느끼는 편안함을 그들도 느끼지 않을까?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도 자연에 안기면 오랜 진화의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살아난다. 방학 동안에라도 머물 시골집이 있는 아이들은 축복받은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쉬운 대로 곳곳에 있는 생태체험학교라도 가는 것은 어떨까?

‘애벌레생태학교’에서 든 생각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있는 ‘애벌레생태학교’(031-771-0551)를 찾았다. 누에를 만지고 명주실을 뽑아보며 콩나물 줄기를 갈아 종이도 만들어볼 수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수풍뎅이나 사슴벌레도 잔뜩 있다. 소금쟁이가 가득한 못에서 미꾸라지 잡이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배추흰나비가 가득한 야생화 정원은 인상적이다.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물과 뭍에 사는 식물들 곁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풀밭에서 갓 태어난 방아깨비와 섬서구메뚜기를 여러 마리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여러 가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욕심을 부린 것은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경험은 놀라움에 그치고 체화되지 못해 겉돈다. 아무래도 시골살이의 풍부함과 깊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아스팔트를 벗어난 아이들은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른다. 여름철에 만나는 화려한 곤충들이 기나긴 애벌레 시절을 어두운 곳에서 지난 사실을 아이들은 알까? 아니, 그 어려움을 느낄 수 있을까? 매미는 7년을 땅속에서 보내고 20여 일 남짓 노래하다 떠난다. 어떤 곤충이든 적어도 한 겨울은 땅속에서 못난 애벌레나 번데기로 지내다가 우화해서 짝짓기를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 우화한 곤충은 식물로 치면 꽃이다.

생식을 위해 잠시 아름다운 형상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꽃과 같다. 한 철을 다 사는 꽃이 거의 없듯이 그렇게 화려한 날은 빨리 지나간다. 화려한 날을 위한 준비는 길다.
지식은 넘쳐나고 지혜나 통찰은 부족한 시대다. 지식은 밀려드는데 그것을 두고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연의 순환을 끈기 있게 지켜보고 찬찬히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