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장|박 대통령 후광 이후락씨 "무소불능"|5공 땐 「경호실」에 밀려 단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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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승만 대통령시절 경무대에 비서는 있었으나 비서실장은 없었다. 초대 실장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기붕은 정확히 말해 비서관장이었지 비서실장은 아니었다.
이 비서관장이 서울시장으로 떠난 후 고재봉이 비서관장에 취임, 유창준·이원희·안희경·박찬일·구본준 등으로 구성된 비서 팀을 이끌었다.
이기붕 비서관장은 부인 박마리아의 지원으로 서울시장·국방장관·민의원 의장을 거쳐 2인자인 부통령에까지 올랐다.
2대 고 관장은 서울부시장·경전사장·서울시장을 역임했다. 고씨는 4·19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리자 9년여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소송비용으로 집과 재산을 다 날려 79년 부인과 동반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공식 기록상의 첫 청와대비서실장은 이재항이다. 그러나 내각중심제 하의 실권 없는 윤보선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으므로 이렇다 할 일화가 없다. 이씨에 이어 이동원(나중에 외무장관)이 박정희 권한대행의 비서실장이 됐다. 그러나 그의 비서실장 경력을 기억하는 일반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말하는 권력자 개념의 비서실장은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이후락이 처음이다. 별명이 제갈조조였던 이 실장은 비서실진용을 갖춰 5년10개월간권력자로서 주름잡았다. 그는 지모와 술수로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박 대통령의 권력기반을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자금 주물러>
이 실장은 박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 속에 경쟁자를 따돌리면서 정치자금을 주물러 권력과 함께 엄청난 치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떡고물 시비」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3선 개헌 파동으로 주일대사로 나갔다가 1년여 만인 70년12월 중정부장으로 컴백한 그는 72년10월 유신을 주도했고 1년 뒤 김대중납치파동으로 문책사퇴, 여권 본류에서 밀려났다.
후임 김정렴 실장은 9년2개월이란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재무·상공장관을 역임한 경제통의 김 실장은 박경호 실장과 그 후임 차지철과의 마찰을 피해가며 박정권 후반의 실력자로 자리를 굳혔다.
말이 9년2개월이지 갖은 음모가 난무하는 최고권력자 주변에서 이 기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대통령을 따름으로써 청와대와 당정을 요리했지만 뒷날 유신이 붕괴된 때도 화를 면했다. 그의 처세는 단연 비서학 원론에 수록될만했다. 김 실장은 차지철의 전횡이 극도에 이른 78년12월 주일대사로 나가 10·26을 맞았다.
후임 김계원 실장은 재임 10개월여 동안 차지철의 등쌀에 제대로 운신을 못했다.
육참총장에 중정부장까지 지낸 그였으나 육영수 여사 사후 방황하던 박 대통령의 말벗· 술벗으로 「소일」했다. 또 차 때문에 앙앙불락하던 김재규 중정부장을 달래는 것도 큰 일과였다. 결국 궁정동 「대연」에 참석하는 것으로 비서실장직을 마쳤고 신군부에 의해 구속됐다.
박 대통령이 비명에 간 뒤를 이은 최규하 대행의 비서실장은 최광수. 본래 외교관출신으로 38세에 국방차관을 지낸 그는 출중한 어학실력 등이 평가돼 박 대통령의 의전수석비서관에 기용됐다가 10·26을 맞았다. 최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던지면서 신군부에 배려를 요청한 것도 최 실장과 서기원 공보수석 둘이었다. 최 실장은 이후 체신·외무장관을 지냈다.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들은 한마디로 미미한 존재였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별로 의존하지 않는 데다 2인자인 장세동 경호실장(후일 안기부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이-장 사건, 아웅산 사태, 6·10민주항쟁 등 대형사건·사고 때마다 비서실장을 갈아치웠고 평균 재임기간이 1년 남짓했다.
전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인 김경원은 허화평 정무·허삼수 사정·이학봉 민정수석이란 보안사출신 트리오에 부대끼다 1년여만에 유엔대사로 떠나야했다.
외교관출신으로 후임실장이 된 이범석 통일원장관은 취임 5개월만에 외무장관으로 전출했다. 이-장 사건 처리과정에서 노신영 외무장관이 안기부장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후임 함병춘 실장은 국제정치학자.
타임지가 80년대를 움직일 세계의 100대 인물로 꼽았고 박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시절 직언을 했다해서 비서실장의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함 실장은 전 대통령의 미얀마방문수행 중 폭발사고로 순직했다. 전임실장인 이 외무장관도 함께 숨졌다.
아웅산 사대로 5공 네 번째인 진의종 내각이 출범하면서 김상협 내각의 강경식 재무장관이 5공 네 번째 비서실장이 됐다.

<금융실명제 추진>
비록 실패했지만 금융실명제를 뚝심 있게 밀어붙여 「강경식」이란 별명이 붙은 그였으나 정치자금조성 등 알짜배기는 장세동 실장이 대기업들과 직거래하는 상황에서 경제전문가로서의 역할도 한계가 있었다. 후임인 이규호 비서실장은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듯 했지만 9개월도 못돼 퇴장했다.
박영수 비서실장은 그래도 1년9개월을 재임하면서 나름의 시도를 했다.
헌병 대령출신으로 치안국장·부산시장·국민회의 사무총장·서울시장을 두루 거친 박 실장은 일반행정·치안부문 등을 챙기면서 위치확보에 나섰지만 박종철 사건 등으로 된 고생만 하다 6·10민주항쟁으로 물러났다.
후임엔 김윤환 정무 제1수석이 승진기용 됐다.
언론인출신으로 10, 11대의원을 지낸 김 실장은 노태우 대통령후보와 경북고 동기동창으로 청와대와 당의 가교역할을 그런 대로 해냈다.
5공 종반의 비서실장으로7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민정당 정권재창출 등 현안과 얽혀 상대적으로 영역이 커진 탓도 있었다.
6공 초대 비서실장은 유신시절 내무·보사장관을 지낸 홍성철. 예순을 넘긴 노 실장은 모나지 않고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달리 보면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홍 실장은 2년이나 청와대에 머무르다 통일원장관으로 옮겨갔다. 후임실장인 노재봉 정치담당특보는 전임자와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야심이 있고 자기주장이 강해 청와대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정계는 내각책임제가 지론인 노 실장을 주목했다.
여야정치권이 잔뜩 긴장하는 가운데 노 대통령은 노 실장을 9개월만에 총리에 지명했고 상도동은 YS 「대체카드」로 보이는 노-노 라인에 포화를 집중시켰다.
이는 비단 YS진영만이 아니었다. 그의 잇따른 강성발언에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고 전례 없던 총리사퇴촉구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노 대통령은 결국 노 총리를 5개월만에 경질, 대권 후계자쟁탈 1라운드는 끝났다.
비서실장의 총리 임명으로 기세가 오른 청와대의 새 비서실장은 정해창 전 법무장관이었다.

<개혁작업 선봉장>
노 대통령의 경북고 후배인 정 실장은 이내 장악력을 발휘, 청와대와 당정을 리드하는 듯 했다. 치밀하고 과묵하나해서 「컴퓨터」라는 별명이 있는 정 실장은 수서 비리로 청와대 본관까지 화살이 날아들었으나 서두르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박관용 비서실장은 가신그룹은 아니면서도 신임이 아주 두텁다.
김 대통령은 야당가에서 찾기 힘든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을 보유한 4선의 그를 비서실장에 기용, 안정기반을 닦고 있다.
박 실장은 수시로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1차 과제인 부정 척결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일련의 개혁정책을 기획·입안하는 그는 김 대통령의 가신 중 가신인 김덕룡정무1장관과 쌍두를 이루며 새 한국으로 치닫는 중이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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