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TV] 날쌘 유지태 홍상수스럽게 어슬렁거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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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홍상수 감독은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 만드는 방식의 독특함으로도 유명해져 버렸다. 사전에 시나리오를 한권으로 묶어내는 대신 촬영 당일 아침에 최종완성한 대사를 낱장으로 건네는 것이 그 한 예다. 지난 4일 경기도 부천시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개된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촬영현장도 그랬다.

이 영화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영화감독 지망생 헌준(김태우)이 대학후배이자 미술대학 강사인 문호(유지태)와 술을 마시다 두 사람이 예전에 각기 시차를 두고 사귀었던 한 여자 선화(성현아)를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틀 간의 이야기다. 이 날은 세 사람이 밤을 보내고 난 뒤 선화와 헌준이 약수터에 가고 혼자 남은 문호가 대학 제자들을 우연히 만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 배우의 발견

"선생님 가시죠, 애들 벌써 나갔는데요."

"어,끝났어?"

백일몽이라도 꾼 것일까. 학생 역할 배우의 대사가 들리자 겨울볕을 받으며 운동장 귀퉁이에 앉아 졸던 남자가 부스스한 머리를 든다. 둔중한 몸집이 무거운 듯 걸음조차 어기적어기적 옮기는 그에게서 '올드 보이'의 날렵한 모습은 간 데 없다. 이 영화를 위해 두 달 동안 무려 20㎏의 '물살'을 불렸다는 배우 유지태씨다.

"본래의 지태씨보다 나이가 있는 역할인 데다, 결이 굵고 거인같이 보였으면 하는 배역이라서요. 한 10㎏쯤 늘었을 걸요." 배우의 늘어난 몸집을 애써 줄여 보는 감독의 말이다. 김상경 주연의 '생활의 발견'이후로 '미남 배우 몸집 불리기'는 감독의 장기가 됐다. 김태우씨의 경우는 회상장면의 젊은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처음에는 8㎏가량 체중을 불렸다가 현재의 모습을 위해 다시 14㎏을 빼야 했다. 김씨는 "체중이 늘었을 때는 성격까지 바뀌더라"고 했다.

외모의 변화가 '홍상수의 인물'이 되는 시작인 셈이다.

◆ 배우가 감독에 빠진 날

"오케이입니다."

"오케이랍니다."

감독의 말을 한층 큰 음성으로 되뇌는 배우 유지태씨에게서는 홍감독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겨났다. 유씨의 홍감독 성대모사는 촬영현장의 여흥거리로 톡톡히 인기를 누린다. 그러고 보니 염소수염을 기른 김태우씨에게서도 홍감독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모든 배우가 제 분신이죠. 여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본 어떤 여성상이 들어있는거죠." 감독은 이번의 대학강사와 영화감독 지망생을 포함, 자신의 극중 인물이 모두 자신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역할임을 상기시켰다. 물론 이런 분신 제조과정은 배우들의 본래 모습에서 감독이 포착한 단면과 화학작용을 거친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가위 바위 보의 벌칙까지 동원해 술을 마시면서 배우들과 적잖은 만남을 갖는 것은 홍감독의 널리 알려진 습관이다.

하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배우의 즉흥연기 따위는 설 자리가 없다. 두 배우는 "대사의 어순이 감독님의 독특한 방식대로라 처음에는 입에 쉽게 붙지 않았다"면서 "시선을 돌리는 각도까지도 감독님이 정한 대로"라고 전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

그러나 이런 감독에게 동화되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뭐니뭐니 해도 홍상수 영화의 일관된 특징은 남녀관계를 주된 이야깃거리로 다루면서도 낭만적인 로맨스와는 정반대로 살떨리게 사실적인, 그래서 당혹스럽고도 우스운 장면들을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심지어 적나라한 정사장면에서도 말이다.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폼나는 왕자.공주가 아니라 치졸하고 야비한 속물인 점이 발가벗겨지듯 드러난다.

유지태씨는 이런 감독의 시선을 "냉소적"이라고 표현했다. "감독님과 생각이 다른 것은 주로 나이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유씨는 세상살이에 닳을 대로 닳은 문호의 내면에 속속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고민을 드러냈다. 반면 홍상수 영화의 매니어를 자처하는 김태우씨는 "촬영 현장에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순간을 적잖이 경험한다"면서 "감독님의 이제까지 영화 중에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오! 선화

시나리오 없이 제작진.출연진에게서 단편적으로 주워들은 얘기로밖에 전체를 짐작할 수밖에 없는 기자에게 영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선화로 보였다. 성현아씨는 부천의 한 카페 주인이 돼 있는 현재의 모습 외에도 두 남자의 회상과 문호의 백일몽까지 모두 네 가지의 선화를 연기해야 했다.

"촬영을 시간 순서대로 한 데다, 촬영하면서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선화라는 인물이 제 자신과 많이 닮아있어요. 연기를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선화로 살았던 것 같아요. 저도 사랑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첫사랑에게 모든 걸 의지했다가 상처도 받고, 별로 내키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하려고도 하는 그런 인물이 선화예요." 홍상수 영화의 여주인공이 언제나 그랬듯, 이번 영화가 개인적인 상처를 딛고 일어선 배우 성현아씨의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되리라는 것은 쉬 짐작됐다.

촬영 막바지에 이른 이 영화는 오는 5월께 관객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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