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는 언제 웃고 울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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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MBC]


네티즌들은 찰나도 놓치지 않았다. 지난 26일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의 엄기영 앵커가 잠깐 미소를 보였던 것은 약 1초 남짓. 아프카니스탄 피랍 관련 소식을 전하던 순간이었다. 이 짧은 순간은 ‘엄기영 방송사고 동영상'이라는 제목으로 이튿날 내내 인터넷을 떠돌았다. 갑론을박도 이어졌다. 하루 종일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뉴스 앵커가 한 순간 지은 표정이 왜 이토록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일까? 물론 그 표정은 부적절했다. 온국민의 근심거리를 전하면서 웃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유도 있었다. 엄기영 앵커는 뉴스의 화제를 바꾸면서 현장의 기자를 매끄럽게 부르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웃었다. 자신의 웃음이 화면에 잡히리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수 직후 사과까지 했지만 네티즌은 쉽사리 용서하지 않았다. 당사자는 이 일에 대해 ‘인터넷이 무섭긴 무섭다’고 평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앵커가 무섭긴 무섭다는 식으로 말이다. 앵커는 발언이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관심의 표적이 된다. 사소한 표정의 변화만으로도 뉴스 시청자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엄기영 앵커는 14년간 국내 최고 뉴스 프로그램의 간판이었다. 큰 실수도 없었다. 뉴스 시청자, 즉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늘 신뢰감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사소한 실수는 오히려 중대한 뉴스가 된다.

이 점은 저널리즘 분야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비슷하다. 폐암으로 지금은 고인이 된 미국 공중파 방송인 NBC의 간판 앵커인 피터 제닝스는 워낙 무표정한 얼굴로, 냉철하게 기자를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팔을 데스크에 올려놓으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는 제스쳐를 취할 때가 있었다. 이럴 때 상당수의 미국민들은 뭔가 중요하지만, 온전히 믿기에는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엄기영 앵커의 경우가 가장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국내에서도 비슷한 일은 잇따르고 있다. 지난 달 28일 SBS ‘8 뉴스’에서 캄보디아 항공기 추락 사고를 전하면서 김소원 아나운서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이 시의적절한 표정은 많은 국민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틀 후 한국방송(KBS)의 예능 프로그램인 ‘스타 골든벨’에서 박지윤 아나운서가 보인 눈물은 빈축을 샀다. 동료 진행자가 던진 가벼운 책망에 뒤이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방송가에서는 앵커가 웃음과 눈물을 남용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영악한 일부 앵커들이 시청자와 네티즌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웃음과 눈물을 흘린다는 지적이다. 방송 앵커들의 성공과 실패담에 관한 고전적 영화인 ‘브로드캐스트 뉴스’(1987년 작)에서도 앵커의 눈물 조작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뉴스의 내용보다는 발음과 표정, 그리고 제스쳐에 더 신경을 쓰는 톰(윌리엄 허트 분)은 강간 여성을 인터뷰하면서, 안약을 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편집해 삽입한다.

인터넷의 존재로, 최근 국내 방송 앵커들의 표정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TV 공중파 뉴스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 미국보다도 더하다. 앵커의 웃음과 눈물이 온국민의 논란거리가 되는 일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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