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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은 성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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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잡동사니란 뜻의 영어 단어 clutter의 어원은 ‘가능한 한 끝까지 묶어 둔다’라고 한다. 일상은 대개 잡동사니들로 사람을 묶어 둔다. 그러다 묶인 사람까지를 잡동사니 같아지게 한다. 그런 악력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여행, 특히 거리감이 분명한 외국으로의 여행이다. 그래서 외국 여행지를 정할 때 나는 보다 이국적이고 비일상적인 곳을 선호한다. 『여행의 기술』을 쓴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양 만세, 오렌지나무·야자나무 만세, 바닥에는 대리석, 나무로 벽을 친 방에서는 사랑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서늘한 천막 만세!’ 같은 곳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 상하이는 예비 순번에도 한 번 오른 적 없는 도시였다. 바퀴벌레와 삭은 단무지의 중국집만 연상되는 곳. 그래서 몇 번이나 그냥 갈 수 있는데도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꽤 비싼 경비까지 지불하면서 무조건 가야 했다. 비싼 입장료를 치르면서 동네 중국집 가는 기분이었다. 도착해 보니 예상보다 훨씬 크고 현대적이긴 했다. 그래도 서울과 비슷했다. 여행 온 기분 같은 건 어디서도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맥이 빠졌다.

하지만 단 한 가지라도 인상적인 게 있으면 그 여행은 성공이다. 인상적인 게 단 한 가지도 없는 여행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여행은 무조건 성공하게 돼 있다. 여행지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자 대신 들어오는 것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게 동행한 친구들의 장점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문화적인 안목들은 물론이고 재치와 사려 깊음, 건강한 무심함, 시원스러운 결정력 등이 어찌나 새롭고 신선한지 엠티 온 대학생처럼 즐거웠다. 그래도 중간에 몇 시간쯤은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은 쇼핑을 핑계대고 빠져나오려 했다. 한 친구가 잡았다. 무슨 쇼핑 같은 데 시간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옆 친구가 그 친구를 잡았다. “시인이 혼자 사색하고 싶대. 놔둬.” 사랑스러운 친구들! 시간에 대한 가치관이 비슷하거나 타인의 고유성을 이해할 줄 아는 동행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여행은 무조건 성공이다.

여행은 뜻밖의 순간에 큰 선물을 주기도 한다. 심드렁해 있을 때 불쑥 주어선 그만 뜻밖의 눈물까지 터뜨리게도 하는 것이다. 여행 마지막 날 밤 경극 공연이 취소돼 서커스 공연에 가게 됐다. 썩 내키지는 않아 그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한 소녀가 배를 바닥에 댄 채 머리와 팔다리를 뒤로 백합꽃처럼 꺾어 오므리면서 뒤집은 손과 발바닥, 어깨와 이마에까지 등불을 얹는 장면에서였다.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저게 바로 일상이지. 한 순간이라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바로 이마에 불이 옮겨붙는 저것이. 그런데도 그 뜨거운 불길을 각성하지 못한 채 곧잘 건들대는 것이. 너무나 쓰라렸다. 한편으론 돌아가면 절대 엄살부리거나 변명하거나 나약하게 굴지 않으리라, 뜨겁게 설렜다. 굉장히 강하고 성숙해진 기분이었다. 여행은 역시 들인 것 이상을 돌려주는 것이다.

여름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다시 뒤적이곤 한다. 소설 서두에서 뒤라스는 사랑이든 일상이든 오래되면 권태 때문에 고약해지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바캉스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결론 부분에서 그 단정을 번복한다. “이 더위는 혁명적으로 뜨겁고 아름답다”고. 작고 아름다운 타키니아 벽화를 보러 가면서 주인공들 모두를 화해시키는 것이다.

휴가여행이 절정을 이룰 때다. 어디에든 휴가와 여행을 성공시켜줄 작고 아름다운 벽화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단 하나라도 찾아내는 순간 여행은 무조건 성공이다. 돌아와 ‘혁명적으로 뜨겁고 아름다운’ 일상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시길.

김경미 시인·방송작가

◆약력:한양대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수료,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FM 가정음악 작가